조선 조정의 선전관 박천봉이 이순신에게 들고 온 선조의 유지(有旨)였다.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군 열선루(列仙樓)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그날 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누대 위에서 술에 크게 취했다.(‘난중일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맨정신으로는 버텨내기가 어려웠다.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지 12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1597년의 한가위는 조선 건국 이래 가장 슬픈 보름달을 맞이한 날이었다. 휘영청 달 밝은 그날, 전북 남원성에서는 1만 명의 백성과 조명(朝明) 연합군이 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죽어갔다.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에서도 조선 관군과 백성들이 전멸했다. 바로 이날, 수군 철폐령이 이순신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순신은 선전관에게 선조의 유지 작성 당시(8월 7일) 영의정 유성룡의 행방을 물었다.
“영상(領相·영의정)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행 중이십니다.”(‘난중일기’)
이순신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 유성룡이 조정에 있었다면 수군 철폐령이라는 어이없는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이 배도 없고 병사도 없이 수군을 재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육지의 관군들조차 공황 상태에 있었다.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의 패전 소식이 알려지자 당상관급 무관들조차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달아나거나, 관직에 제수된 뒤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일부러 파직을 자처하는 등 몰염치한 행태를 보였다.(‘선조실록’) 그러니 이순신더러 육군에 참여해 기여하라는 거였다.
선조의 명령, 목숨 걸고 거부해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단했다. 순천의 낙안읍성에 들렀을 때 자신을 보기 위해 5리 근처까지 길을 가득 메운 백성들의 절절한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길가에 늘어서서 집에서 빚은 술을 다투어 바치던 마을 노인들의 눈물을 도저히 외면할 순 없었다.(‘난중일기초’)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할 자신감이 있었다. 8월 3일 통제사로 복직된 이후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순신이 8월 8일 순천읍성에 도착했을 때는 청야책(淸野策)에도 불구하고 소각되지 않은 관사의 병기(兵器)류를 대거 확보할 수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순천을 떠나면서(8월 6일) 이곳만은 청야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남원성 북문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이복남은 이순신이 반드시 순천을 찾을 걸로 예상해 무기를 남겨두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순신은 순천에서 획득한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활과 화살, 화약 등을 군관에게 져 나르게 하고, 총통 등 운반하기 어려운 무기들은 훗날 쓰기 위해 깊이 묻어두었다.(‘난중일기’)
천운은 또 따랐다. 그의 처(상주 방씨)의 고향인 보성에서는 식량까지 확보했다. 보성 고내마을의 조양창에서 봉인을 한 채 온전히 남아 있는 군량미 600섬을 발견한 것이다. 장정 600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진주에서 15명의 병력으로 시작한 이순신이 호남 지역에 들어가 병사들을 모아 나가면서 8월 9일 보성에 도착했을 때는 정예병만 12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과거 호남의 백성들은 한번 수군에 차출되면 죽지 않고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여겨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을 ‘귀신굴(鬼窟)’이라고 불렀다.(‘선조실록’) 전사한 수군 가족을 둔 백성들은 통제사 이순신을 원망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 패전으로 호남이 쑥대밭이 되고, 왜군들의 무차별 살육 행위를 직접 당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수군에 지원했다. 거기다 칠천량 해전에서 빠져나온 배설의 판옥선도 해상에서 인수하기로 날짜까지 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결국 이순신은 열선루에서 선조에게 보내는 장계를 올렸다. 명령 불복종을 싫어하는 선조의 노여움을 사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장계였다.
“지금 수군을 전폐시키는 일이야말로 적에게 다행한 일입니다. 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매우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않아 적이 감히 저를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이분의 ‘충무공행록’)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며 피를 토하듯 수군 철폐령을 반대한 글이 바로 이 장계였다.
기자는 이순신이 이례적으로 9일간(1597년 8월 9∼17일) 머물렀던 보성의 열선루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원래는 보성군 객관 북쪽의 옛 취음정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뒤를 밟아온 왜군이 후에 이순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보성읍성과 열선루, 보성향교 등을 불태워 없애버린 것이다. 열선루는 전란이 끝난 뒤인 1610년 복원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같은 이유로 다시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이 들어서 있다. 몇 해 전 청사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발굴된 열선루의 주춧돌과 댓돌들이 현재 군청 앞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보성군은 보성읍 보성리 신흥동산 일원에 열선루를 중건할 계획이며 그때 이 돌들을 그대로 사용할 예정이다.
이순신의 장인 방진이 머물렀던 옛 보성군수 관사 자리는 ‘방진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돼 있다. 이순신은 명궁(名弓)으로 이름난 방진(1530년경 보성군수) 밑에서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무과 시험을 준비했다. 보성은 이순신으로서는 각별한 애정이 있는 고장이었다.
8월 17일, 마침내 이순신은 결전지로 선택한 전라우수영 해역으로 출발했다. 그가 떠나는 날 보성의 백성들은 “이야(李爺·이순신을 존경해 부르는 초칭)! 이야! 어버이여!”를 연호하며 눈물로 응원했다.
이순신은 보성의 해안가 마을(군영구미)에서 지방민이 제공한 향선(鄕船) 10여 척에 식량과 무기를 싣고 바다로 나가 이튿날인 18일 장흥 회령포(회진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수군에 제일 중요한 판옥선을 인수받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빠져나온 배설의 판옥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이끄는 배 등 모두 13척의 배를 수습했다. 그제야 이순신은 “이제 됐다”고 한숨을 돌렸다. 8월 3일부터 8월 18일까지 16일간 300여 km의 육지 대장정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민심과 군심을 수습하다
사실 후대의 군사 전략가들은 한산대첩 등 혁혁한 승전보다도 13척의 배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기까지의 이순신 행보에 더 비상한 관심을 둔다. 불과 달포 남짓한 기간에 병력, 무기, 식량 등에서 전력 제로 상태의 수군을 어떻게 재기시켰는지가 연구 대상인 것이다. 더구나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조선수군을 재건하려 한 이순신은 조정의 지원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혼자 힘으로 수군을 일으켜 세워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무엇보다도 민심을 얻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정식 병력 조달 체계가 무너진 가운데서 사방으로 흩어진 군사들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신념을 주어야 했다. 이 점에서 전승(全勝) 신화를 기록해온 이순신은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백성들에게 각인돼 있었다는 게 주효했다.
피란민들은 향선에다 짐과 식량 등을 싣고서는 이순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순신이 “대적이 바다를 뒤덮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쩌자고 여기에 있는가?”하고 묻자 피란민들은 “저희들은 다만 사또만 바라보고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하고 대답했다.(이분의 ‘충무공행록’)
피란민들은 이순신과 같이 있을 때가 제일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피란민들에게서 군사들을 먹일 식량과 옷 등을 제공받는 대신 피란민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했다. 전투를 치를 때는 피란민들을 먼저 대피시켰다. 이순신과 피란민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굳은 신뢰와 상생 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백성을 동요시키는 유언비어를 특히 엄격히 다루었다. 8월 25일 이순신이 어란포(전남 해남군 송지면)에 머물 당시 포작(鮑作·어업을 위주로 삼아 연안을 떠도는 유랑민)들이 “왜적이 왔다”고 허위 경보를 알렸다. 방목 상태의 소 두 마리를 훔쳐 잡아먹기 위해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려 벌인 사기극이었다. 이순신은 즉시 포작 2명을 잡아들여 목을 베어 효시했다. 그제야 군중심리가 크게 안정됐다.(‘난중일기’)
이순신은 무너진 군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도 역점을 두었다. 도피한 각 고을 수령들을 불러내 질책하면서 이들이 조선 수군의 후방 기지가 되도록 엄격히 관리했다. 장흥에서는 군량을 훔쳐가 관리들과 나누어 가지려던 감관(監官)과 색리(色吏·하급관리)를 붙잡아 중한 장형(杖刑)으로 다스렸다. 회령포만호가 사사로이 판옥선을 빌려주고 물건을 받자 곤장 20대로 치도곤을 먹였다. 휘하 부하가 명령을 잘 수행하지 못해도 가차 없는 곤장 세례가 이어졌다. 이순신은 군기와 군령에 있어서만큼은 지옥사자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군 “조선수군을 소탕하라”
이순신이 전투 준비를 끝낼 무렵,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던 왜군들도 포로 등을 통해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지휘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일본 수군은 하동과 구례에 정박해 있던 배를 타고 해상에서 조선 수군을 완전 소탕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칠천량 해전의 승리가 일본 수군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임진왜란 당시 당포해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에게 목을 베인 형(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복수를 위해 이순신을 잡겠다고 별렀다. 구루시마 형제는 일본 시코쿠(四國)의 이요(伊予)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해적왕 출신이었다.
이순신은 이진(해남군 북평면, 8월 20일), 어란포(해남군 송지면, 8월 24일), 장도(해남군 황산면, 8월 28일),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8월 29일) 등으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수군 진영을 구축하고 왜군과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옥죄어오는 왜군을 교란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뒤를 바짝 쫓았다. 이순신이 3일간 토사곽란으로 심하게 아파 23일까지 머물렀던 이진에는 사흘 뒤인 26일 일본 수군이 들이닥쳤다. 일본 수군은 정찰선인 고바야를 한두 척에서 열 척이 넘는 규모로 편성해 끊임없이 이순신의 수군 능력을 확인하려고 했다. 때로는 야간 기습으로 조선 수군의 자체 붕괴를 노리기도 했다.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야간기습으로 제대로 싸우지 않고서도 조선 수군을 크게 이긴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조선 수군은 야습까지 포함된 연속된 공격을 번번이 격퇴했다. 8월 28일 어란포에 8척의 일본 전선이 기습해오자, 이순신은 해남 땅끝 마을 앞바다까지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칠천량 패전 이후 처음으로 왜선을 물리친 ‘어란포 해전’이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면서 깃발로 진두지휘해 칠천량 패전 이후 겁을 먹은 조선 수군들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 9월 7일 13척의 일본 정예 함선이 벽파진에서 야간 기습 공격을 해왔을 때는, 이순신이 대비하고 있다가 판옥선을 지휘해 지자포(地字砲) 포격으로 적선들을 혼비백산케 했다.
물론 일본 수군 지휘부도 이순신의 판옥선이 불과 13척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는 수확이 있었다. 1000척이 넘는 전선을 보유한 왜군은 아무리 이순신이 있다 하더라도 전력 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인 조선군과 싸워서 이길 만한 싸움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알리는 서전은 장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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