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세 줄 요약부터. 1. 고조선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부터 고조선이었습니다. 2.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3. 우리가 단군 할아버지 얼굴을 알고 있는 데는 동아일보도 한 몫 거들었습니다.
●고려 시대 책에 왜 고조선이 등장할까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은 단군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터 잡으시고’ 고조선을 세우셨다는 날. 학창시절에 배운 것처럼 고조선은 원래 나라 이름이 조선이지만,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세운 조선(1392~1910)과 구분하려고 앞에 옛 고(古)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한다고 알고 계신다면 사실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왜냐하면 조선 이전인 고려 시대 승려 일연(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에 이미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삼국유사 중 기이(紀異) 제1편 제목이 ‘고조선 왕검조선’입니다.
삼국유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 중에서 단군(왕검)이 처음 등장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군은 처음부터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을 세운 셈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일연이 정말 뛰어난 스님이라 자기가 세상을 떠나고 46년 뒤에 세상에 들어설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는 걸 미리 예상한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크게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학자들이 ‘기자(箕子)조선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인정하지만, 기원전 194년 위만(衛滿)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조선 정권을 장악했다는 건 정설입니다. 이렇게 나중에 위만조선이 들어섰기에 일연을 이를 단군(왕검)조선과 구분하려고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겁니다.
아무 날짜나 골라서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한 건 아닙니다. 함경도 지방 등에서는 음력 10월 3일에 단군 탄생일을 축하하는 ‘향산제(香山祭)’라는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양력 10월 3일로 개천절 날짜를 못 박기 전에 대종교에서는 개천절을 음력으로 기념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아래 사진).
그런데 왜 당시 정부에서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서 기념일로 정하지 않았을까요? 당시에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없어서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음력을 양력으로 바꿀 줄 알았습니다. 한글날이 10월 9일인 건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1446년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꾼 결과물입니다.
문제는 과거로 갈수록 해(양력)와 달(음력)의 정확한 움직임을 계산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음양력 변환 서비스는 1391년까지만 계산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은 이 해로부터도 3724년 전입니다. 그러면 날짜를 바꾸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음력이라고 부르는 ‘시헌력’도 1644년이 되어서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이라는 것도 100%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 게 사실. 그래서 당시 문교부에서는 ‘10월 3일이라는 날짜가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았습니다.
● 4350년 전 단군 할아버지 얼굴은 어떻게 알까
이렇게 우리는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이 양력으로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단군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음먹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실 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가장 객관적인 이유는 물론 ‘정부표준영정’ 때문입니다. 정부는 1978년 홍숙호 화백이 그린 단군 초상화를 표준영정으로 지정했습니다(아래 사진). 이 영정은 현재 서울 종로구 단군성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홍 화백도 무엇인가 보고 그렸겠죠?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 동아일보를 보면 사람들이 단군 할아버지 얼굴을 계속 궁금해 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열흘 뒤인 그달 11일부터 창간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 현상 공모’를 실시합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영정을 그해 10월 3일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그해 9월 26일 일제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기에 해당 날짜에 신문을 펴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1922년 11월 21일(음력 10월 3일)자 지면에 단군 영정이 등장합니다.
이 기사는 단군 영정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밝히고 있지 않아 공모전 당선작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가져온 사진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 이 영정은 국내 최고(最古) 단군 영정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부여천진전단군화상(扶餘天眞殿檀君畵像)’과 닮아 있습니다.
단군은 동아일보 창간호에도 등장합니다. 동아일보 창간 멤버였던 김동성 기자(1890~1969) 창간호 3면에 삽화(아래 그림)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동아일보라고 쓴 띠를 두른 갓난아이가 단군유지(檀君遺趾)라는 액자를 잡으려 하고 있고 있습니다.
아, 한국 정부는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에 따라 단군기원, 즉 단기를 국가 공식 연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40~60년대 자료를 보다 보면 지금 우리가 쓰는 서기가 아니라 단기로 날짜를 표시한 건 그런 이유입니다. 단기를 사용하지 않게 된 건 1962년 이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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