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서부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심원에서부터, 창세기 이전에서부터 준비되어 왔던 영혼의 방.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가정의 방에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았던 나의 아내여. 그리고 나를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유순한 가족, 그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리고 또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최인호 ‘가족’ 중에서
최인호 선생(1945~2013)의 많은 연재물 중에서도 가장 오래 지면에 연재한 작품은 ‘가족’이다. 1975년부터 35년 동안 잡지 ‘샘터’에 쓴 가족 이야기다. 샘터에 근무하던 문우들이 매달 콩트식 연작소설을 한 편씩 싣자고 제안했고, 그는 가족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연재를 시작했을 때 네 살이었던 딸 다혜, 두 살 아들 도단이는 연재 기간동안 성장했고 결혼해 저마다의 가족을 이뤘다. 작가는 사위와 며느리를 맞았고 손녀를 봤다. 어머니가, 누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 오랜 기간 작가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정하게 들려주었다.
가족은 신비한 집단이다. 아침엔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다퉜다가도 저녁에 보면 어느새 마음이 풀려 있다. 부모-자식이라는 선택불가능의 관계, 어찌할 수 없이 매일을 함께 하는 관계라는 건 엄청난 인연이다. 그 가족의 일상, 서로 부대끼는 순간순간이 최 선생의 다감한 글에 담겼다.
생전의 최 선생이 그렇게 다감했다. 얼마 만나지 않았는데도 오래 본 듯 말을 건네고 정을 보였다. 그 따스함이 가족의 힘이었으리라. 긴 추석 연휴, 우리에게 따뜻한 힘이 되는 가족과 정을 나누고 북돋울 시간이다. 최인호 선생이 글에서 인용한 김수영의 시 ‘나의 가족’의 마지막 두 연.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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