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18년 만에 모인 4·19세대의 회고…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0일 15시 25분


일상에서 길어올린 시제를 평이한 시어로 쓰며 감동을 전하는 김광규 시인. 동아일보DB
일상에서 길어올린 시제를 평이한 시어로 쓰며 감동을 전하는 김광규 시인. 동아일보DB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이 시 제목은 잘 알려졌다. 표면적인 단어의 뜻 그대로 오래 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추억을 환기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18년 만에 모인 4·19세대의 회고다.

시는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라며 토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로부터 18년, 넥타이를 매고 만난 우리는 처자식들과 월급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대화는 18년 전 열띤 토론과는 멀어졌다. 말하자면 세상을 개탄하되 ‘즐겁게’ 개탄하는 모습이 된 것이다.

술자리가 파한 뒤 몇몇이 향한 동숭동 길은 그들이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다. 예전과 다름없이 한결같은 가로수들 아래로 달라진 중년 사내들이 걷고 있다. 이들의 귀에 바람의 속삭임이 들리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이들은 건강 문제를 고민하며 나눈다. 시인의 시는 ‘일상시’로 불린다. 그만큼 평이한 일상어로 이해하기 쉽게 쓰였다. 그런데 그 쉬운 시어를 통해 전달되는 울림은 크다.

이 시는 1982년 4월 ‘신동아’에 실렸다. 4·19 혁명 후 22년이 지난 때였다. 혁명의 뜨거움에 달궈진 감수성은 젊은 시절의 ‘사랑’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제 중년이 된 이들에게 젊은 날의 기억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돼버렸다. 혁명이든 꿈이든 사랑이든 젊은 시절 뜨거운 열정을 품었으나 이제는 세속과 타협한 이들에게 바람의 말로 시인이 묻는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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