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 때도 의병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선봉에 서서 싸웠다. 그들 대부분은 전투에 밝은 무인 출신이 아니었다. 칼을 들어본 적도 없는 전직 문관이거나 선비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전란 극복의 주역을 자임했다.
1597년 9월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처참하게 패한 일본 수군은 남해안의 웅천(진해 인근)으로 물러나 전력을 재정비한 뒤 포구 곳곳에 들이닥쳤다. 왜군은 3, 4척 혹은 8, 9척씩 짝을 지어 서해안의 영광까지 북상해 여러 섬을 수색했다. 왜병들은 주민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노예사냥을 했다. 영광에서는 피란선 7척을 붙잡아 모조리 몰살시키기도 했다.(‘선조실록’)
이에 맞서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특히 이순신의 명량 승전 소식을 들은 호남 연안 백성들은 이순신의 수군 진영 근처로 속속 모여들었고, 수군 재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정사정, 이몽린, 이극성 등 지역 유림들은 가내의 하인 수백 명과 장정들을 거느리고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크게 활약했다.(‘이충무공전서 동의록’·‘호남절의록’)
전몽성·몽진 형제, 김덕란 등 지역 유생들은 1597년 9월 하순, 200여 명의 병력으로 영암 해암포 지역의 일본 수군과 직접 맞섰다. 이 해안에 상륙했던 왜병들은 의병의 매복과 유격 작전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의병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이 시기의 의병 활동은 전라도 연해에서 전투를 했다는 점에서 ‘해상 의병’의 성격을 띠고 있다.
경상지역의 의병들도 분연히 일어나 관군과 연합해 왜군에 맞섰다. 1597년 8월 하순 경북 달성에서 손기양(신령현감)과 사명대사의 지휘 아래 의병들은 달성에 웅거하고 있던 왜군과 6일에 걸쳐 8번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죽은 왜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아군도 100여 명이 전사했다.(崔認의 ‘한산유고’) 그해 9월 22일엔 왜군이 팔공산에 있는 조선군을 기습하자 각지의 의병장들이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원했다.
사실 정유재란 초기에는 영호남 가릴 것 없이 의병이 봉기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1597년 7월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전라도가 전면적인 침략을 당해 백성들이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상황이 두 달여 지속되면서 선비들을 중심으로 싸우다 죽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호남과 경상 지역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은 절박한 상황에서 봉기한 결사대나 다름없었다.
의병활동은 영호남을 가리지 않았다. 영남 출신 의병장들이 호남 지역에서 왜군과 맞섰는가 하면, 호남 출신 의병장들도 영남 지역에서 싸웠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행주산성에 참여한 의병들 대부분은 호남 출신들이었다.
물론 정유재란기 의병활동은 의병장 단위별 군사가 수십 명에서 100명 남짓한 경우가 많았다. 조정에서는 의병궐기를 촉발하기 위해 도원수, 통제사, 관찰사가 직접 의병장의 직첩을 발급해주는 방책을 마련하기도 했다.(‘선조실록’)
‘근왕’ 의병과 ‘수토’ 의병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관통해 흐른 의병정신의 효시는 앞서 임진년에 7000여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의 전라좌도 연합의병과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한성 수복을 위해 부근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한 김천일의 전라우도 의병, 경상도 곽재우의 의병 등을 들 수 있다.
의병활동은 나라와 사직을 구하는 것을 분명한 목적으로 삼아 자기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지역까지 진군해 왜적과 싸우는 근왕(勤王)의병과 고향을 수토하는 데 주력한 의병의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고경명이 이끈 호남연합의병은 북쪽으로 달아난 임금과 종묘사직을 구하기 위한 근왕의병임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광주 출생의 선비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던 고경명은 1592년 5월 초 한성이 함락된 뒤 도성탈환을 목표로 창의했다. 그는 6월 9일 격문을 전라도 곳곳에 보냈다. 격문은 피를 토하듯 강렬했다.
“…경명은 글만 아는 한낱 유생으로 병법에는 어둡다. 이번에 망령되이 장수로 추대됐다. 동지들에게 누만 끼칠까 걱정이다…피눈물을 뿌리고 전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싸움에 나가는 날 아비가 아들에게 명하고 형이 아우에게 권하여 함께 나오게 하라. 속히 결단하여 옳은 길을 따르라. 머뭇거리다 일을 그르치지 말기 바란다.”
양대박 유팽로와 함께 7000명 규모의 연합의병을 결성한 고경명은 의병 깃발을 앞세우고 담양에서 출진했다. 창검을 잡아본 일조차 없는 선비가 갑옷을 입고 큰 칼을 찼다. “우리는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싸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바 있다. 임금이 머무시는 곳까지 진격해서 대의를 세우자!”
고경명은 1552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시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한 뒤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를 지내다가 서인이 실각하자 곧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관군은 달아나고, 의병은 지키고
고경명 의병은 한성을 향해 북상하다가 충남 금산으로 방향을 바꿨다. 금산성을 점령하고 있는 왜군이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고경명 의병은 전라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함께 총공세를 폈으나 금산성 탈환에 실패했다. 의병과 좌·우익을 이룬 관군 진영이 먼저 무너졌고 곽영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먼저 달아나자 병사들도 싸울 의지를 잃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나 고경명을 비롯한 연합의병 지도부는 끝까지 현장에 남아 순국의 길을 택했다. 종사관 유팽로는 적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대장을 구하기 위해 말을 돌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조선 중기 평균수명은 40세 미만이다. 60세 고경명은 지금으론 80 중반인 셈이다. 죽음의 문턱에 선 노령의 대장을 구하기 위해 성균관 학유(유생 대표 격) 유팽로는 안영과 함께 적의 칼날을 받았다.
고경명의 차남 인후도 그때 숨졌다. 의병 지도부의 첫 집단 순절이었다.
장남 고종후는 ‘복수의병장’을 자임하면서 11개월 뒤 2차 진주성 전투에 나섰고, 결국 김천일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남강 물에 몸을 던져 아버지와 동생의 뒤를 따랐다. 그때 삼촌 경형과 충직한 두 하인 봉이와 귀인도 남강에 투신해 생사를 같이했다. 고경명 집안에서만, 남녀 7명이 순절했다. 이 집안에서 제사 지내주는 봉이와 귀인까지 합치면 9명이다. 청사에 남을 충의(忠義)의 가문이다.
의병의 순국은 그 자체가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더 많은 의병 창의로 이어진다. 금산성에서는 한 달 뒤에도 호서의병장 조헌이 이끈 700여 의병과 의승장(義僧將) 영규가 이끈 수백 여 승병이 왜군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다 모두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곳이 700의총이다. 700의총으로 조헌의병군은 현창을 받았다. 그러나 영규를 비롯한 승병들의 희생은 주목받지 못했다. 억불숭유(抑佛崇儒) 탓이다. 불교계를 비롯한 역사학계는 이들의 희생을 현창할 수 있도록 역사 복원 작업에 나서야 한다.
1차 금산성 전투가 끝난 이후 그해 10월까지 호남지방에서는 봇물 터지듯 의병 창의(倡義)가 이어져 최소한 20여 개 부대가 활약한 것으로 집계된다. 고경명 3부자의 순절이 자극제가 됐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의병 지도부는 금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연합의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그 영향을 받은 선비들로 구성됐다.
의병들의 처절한 순국의 절정은 1593년 6월 21일부터 9일간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였다. 진주성은 전라도 전체의 명운을 좌우할 전략 요충지였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10만 가까운 병력으로 몰아쳤다. 명군은 중과부적으로 방어가 불가능하다며 조선 측에 공성(空城)책을 권고했다. 그러나 다 합쳐야 1만여 남짓한 진주성의 의병과 관군은 항복 권고를 거부한 채 의병전투 사상 최대의 혈전을 벌였다.
밤낮으로 일곱 차례나 격전을 벌여 적을 격퇴했지만 결국은 성을 빼앗겼다. 진주성 내 관·의병과 민간인 거의 모두가 숨졌다. 우리 사서에 6만, 왜군 기록에 2만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한 해 전인 1592년 6월 전남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한양을 향해 북상해 경기도 인근에서 수많은 전공을 올려온 김천일도 이때 순절했다.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막료 양찬숙이 “어찌하시렵니까”라고 물었다.
김천일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창의하면서 나는 이미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다만 너희들이 가엽구나…” 끝까지 호위한 부하 10여 명의 안위만 걱정했다. 북향재배한 뒤 장남인 상건 참모 양산숙과 함께 남강 깊은 물로 뛰어들었다. 논개가 왜적 장수를 껴안고 몸을 던진 촉석루 부근이다. 의병장 최경회와 문홍헌, 고종후도 뒤를 따랐다.
당시 문무병권을 장악한 권신들은 목숨 부지에 여념이 없었다. 염치와 체면 차릴 겨를도 없이 숨거나 달아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의병장들의 희생을 폄하하고 “말에서 떨어진…” 운운하며 패배를 힐난하는 언사를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고경명과 김천일 등 의병장들의 희생은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명나라 장수 오종도마저도 조선 권신들의 행태를 통박했다.
“나랏일을 그르쳐 임금을 피란가게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도 구원하지 않아 성읍을 잿더미로 만들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전히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비록 살아 있을지라도 어찌 의병장의 죽음만 같으리오.”(연려실기술, ‘임진의병’ 김천일·양산숙)
진주성 서문 쪽에는 2차 진주성 혈투 주역들을 배향한 창렬사가 있다. 1차 진주성 전투의 주역 김시민을 필두로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황진 장윤 유복립 등 7명을 열향(列享)한 사당이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임금이 친히 내린 제문을 새긴 비각이 나온다. 선조 때 세워진 창렬사와 포충사는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대상에서 제외됐다.
진주성 혈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 진주에선 요즘 유등 축제가 한창이다.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 진주성 내는 활기찬 분위기다. 420여년 전 이곳에서 왜적과 혈투를 벌이다 유명을 달리한 순국선열들의 마지막을 떠올려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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