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 세 판이 진행되며 득과 실, 날카로움과 무딤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럴 때면 구경꾼 모두 눈을 부릅뜨고 한쪽 발을 굴리며 그 형세를 돕고자 훈수를 두었다.”(조선 후기 학자 안중관의 ‘회와집·悔窩集’ 중)
삼국시대부터 사랑받던 바둑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온 가족이 즐기는 놀이가 된다. ‘소현성록’ ‘유씨삼대록’ ‘조씨삼대록’ ‘명행정의록’ 등 우리 고전소설에는 가족이 모여 대국하는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는 임금과 신하, 여성과 여성, 남녀 성대결도 그리고 있어 조선후기 바둑 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 때 문인 유본학은 ‘문암유고’에서 국수로 꼽혔던 김석신을 소개했다. 김석신은 내기 바둑을 두어 딴 돈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내기만으로 생계를 꾸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세력가의 후원을 받아 생계 걱정을 덜고 오직 기량을 갈고닦는 데 몰입할 수 있었다. 후원자가 있는 일종의 프로 바둑기사는 기객이라고 했다.
최고봉에 오른 이는 국수 혹은 국기(國棋)로 불렸다. 기객 가운데 김종귀와 정운찬은 여러 문인의 글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조선후기 문신 이서구가 쓴 ‘기객소전’이나 이옥이 쓴 ‘정운찬전’에는 시대를 풍미한 정운찬의 이야기가 정리돼 있다. 사촌형에게 바둑을 배운 그는 어찌나 바둑에 몰두했던지 6년간 문밖에 나가지 않았고 바둑돌을 손에 쥐면 먹고 자는 것조차 잊었다. 병치레가 잦았던 그는 10년을 매진한 끝에 오묘한 이치를 깨쳤다고도 했다.
당시 신예 정운찬과 국수 김종귀의 대국은 평양에서 이뤄졌다. 김종귀의 후원자가 평안감사였기 때문이다. 대국에서 국수를 이긴 정운찬은 평안감사로부터 집 한채 가격이 넘는 거금인 백금(은화) 20냥을 받았다. 이후 정운찬은 김종귀와 함께 평안감사의 기객이 됐다. 대회 주최자는 큰 상금을 내걸고 실력이 좋은 기사를 대회에 초빙했고, 즉흥적으로 상품을 내놓고 독려하기도 했다. 한 정승은 정운찬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며 남원산 상화지(霜華紙·광택 있고 질긴 고급 종이)를 상품으로 내놓았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였지만 바둑기사는 서로를 예우했다. 선배를 몰아세우지 않는 대국을 미덕으로 여겼다. 정승이 개최한 바둑 대회에서 김종귀와 정운찬은 다시 마주했다. 두 판을 내리 진 김종귀가 정운찬에게 눈짓을 주었다. 마지막 셋째 판에서 정운찬은 때때로 실수하며 김종귀의 체면을 세워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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