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0월 20일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은 일본 영화와 비디오 출판만화 중 일부를 즉시 개방하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일정’을 공식 발표했다.”(동아일보 1998년 10월 21일자 1면)
4차에 걸쳐 진행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 중 1차로 발표된 개방 계획이었다.
소설가 한수산 씨는 이틀 뒤 동아일보에 게재한 기고 ’日(일) 대중문화 무엇이 우리와 다른가‘에서 일본 대중문화의 키워드를 ’에로티시즘‘, ’센티멘털리즘‘ ’기괴성‘ 등으로 분석했다. 그러면서 “대중문화는 산업이다. 문화라는 말로 호도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벌써 일본에 건넬 로열티를 다른 나라보다 10배까지 뛰어오르게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동아일보 1998년 10월23일자 7면)라고 우려했다.
1차 개방 초기의 이 같은 무분별 수입조짐에 비해선 일본 대중문화의 파급력은 크지 않았다. 그해 개봉작이 대중적인 영화가 아닌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젊은이들은 서울 신촌과 홍대 앞의 영상카페에서 상영된 일본영화, PC통신을 통해 소개된 일본만화 등으로 이미 넓게 노출된 상태였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일본 가수 아무로 나미에 역시 대중문화 개방 조치 이전에 국내에 팬클럽을 갖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일본 대중문화가 신세대에 스며든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개방 이전 일본문화의 유포를 그리 부정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일본문화를 깎아내리거나 떠받들지도 말고 제대로 알고 맛보자는 움직임도 조금씩 움트고 있다”고 전했다(동아일보 1998년 10월 13일자). 그럼에도 일본 대중문화가 광복 후 공식적으로 첫 입성을 선언한 의미인 만큼 문화계의 긴장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 일본을 휩쓴 한류 열풍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은 그해 동아일보가 선정한 10대 뉴스 중 하나였다. “’하나비‘ ’카게무샤‘가 8·15 해방 후 처음 공식 상영됐으나 이들 일본영화에 대한 반응은 예상보다 낮은 편이었다”는 게 총평이었다(1998년 12월 26일자).
그러나 당시 “영화계는 ’정말 휘발성 높은 영화는 다음 개방 때 허용될 것‘이라며 일본 영화 사재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분위기도 전했다. 실제로 1999년 9월 2차 개방 이후 개방된 일본영화 ’러브레터‘가 12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 예측은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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