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어두웠던 시대, 희망을 꿈꾸던 아웃사이더의 삶…최윤 ‘회색 눈사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4일 16시 46분


최현무 서강대 교수. 학자이자 번역가로는 본명을 쓰지만 창작 활동을 할 때는 필명 ‘최윤’을 쓴다. 동아일보DB
최현무 서강대 교수. 학자이자 번역가로는 본명을 쓰지만 창작 활동을 할 때는 필명 ‘최윤’을 쓴다. 동아일보DB
‘나는 가끔 희망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가능성을 조금 맛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애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꺾일 때는 중독된 사람이 약물 기운에 떨어졌을 때 겪는 나락의 강렬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에의 열망은 더 강화될 뿐이다. 김희진이 도착하던 날, 그녀의 피곤에 지쳐 눈 감긴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도 모르게 그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희망이란 것에 감염됐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일생동안 나를 지배하리라는 것도. 나는 막연한 희망에 대한 막무가내의 기대로 김희진을 돌보았다.’

-최윤 소설 ‘회색 눈사람’ 중에서

최윤의 ‘회색 눈사람’은 1970년대 대학가가 배경이다. 가난한 대학생인 화자는 학비를 벌고자 인쇄소 일을 하다 지하운동권 일을 맡게 된다. 운동권에 몸담고 활동하는 이들과 화자 간에는 경계선이 있는 듯하지만 화자는 더 알고자 하지 않고 맡은 일을 성실히 한다. 조직이 발각돼 와해된 뒤 화자는 도망친 조직원으로부터 김희진이라는 여성을 돌봐달라는 것, 화자의 여권과 비자를 이용해 김희진을 미국에 보내달라는 것을 부탁받는다.

이 소설이 지극히 건조한 묘사를 이어감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읽히는 건 작가가 시대의 암울함 대신 한 여대생의 내면풍경을 그리는 데 집중해서다. ‘회색 눈사람’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1970년대라는 엄혹함보다 강하원이라는 한 여성, 지하조직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자신의 삶 자체에도 겉돌 수밖에 없는 여성의 쓸쓸한 마음의 무늬다.

‘회색 눈사람’은 얼핏 화자의 눈으로 본 운동권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실은 시대의 주변부의 삶이었던 화자의 이야기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듯 보임에도 실은 그는 ‘우리’라는 희망을 뜨겁게 바라면서 살아낸 이다. 어두웠던 시대, 영웅이 아닌 한 아웃사이더에게 작가는 이렇게 따뜻한 의미를 부여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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