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례문 복원’은 경복궁 복원 사업 중에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꼽혔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자리에 복원된다는 점에서 가장 상징적인 복원 사업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흥례문 복원으로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핵심 부분이 되살아나게 됐다.”(동아일보 2001년 10월 24일자 A18면)
경복궁 복원사업은 1991년 시작됐다. “경복궁 복원의 당위성은 일제가 왜 침략벽두에 도성의 왕궁과 성곽을 애써 부쉈는지를 살피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당시 서울의 심장이며 한국인들의 마음을 잡고 있던 경복궁의 존재가 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동아일보 1991년 1월 24일자 2면 사설)
이 사업 중 흥례문 복원은 1996년부터 5년에 걸쳐 이뤄졌다. 흥례문과 주변 행각, 유화문(維和門)과 기별청(奇別廳), 영제교(永濟橋) 등 건물 6개동과 어도(御道·임금이 다니던 길) 등 총 517평을 복원하는 사업이었다.
흥례문은 조선 초 태조 때인 1395년 지어졌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됐다. 그러나 1916년 일제가 광화문(光化門)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던 흥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흥례문을 복원할 때 땅을 1.5m 밑으로 파고 근정전의 눈높이에 맞게 지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 원래 경복궁 지반보다 1.5m 높게 지어서였다. 흥례문의 제 모습을 찾고자 한 꼼꼼한 배려였다. 당대의 명필이 쓴다는 현판은 중진 서예가 정도준 씨가 맡았다. 그렇게 흥례문 복원 기념 낙성식이 2001년 10월 26일 열렸다.
동아일보는 이날 횡설수설 칼럼에서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자리에 원래의 임자가 들어섰다”고 적었다. 들보 등에 쓰이는 굵은 목재들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 수입산으로 대체했지만, “문화란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야 우리 것이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조선시대의 궁궐을 21세기에 복원하는 데 대한 의미를 담았다.
경복궁 복원사업은 2030년까지 계속된다. 복원사업 시작 당시 조명됐던 “단순히 새 관광명소나 복고적인 왕궁의 재건이 아닌 우리의 민족정기와 자존심의 복원”(동아일보 1991년 1월 24일자 2면 사설)이라는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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