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이상국의 ‘혜화역 4번 출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6일 15시 46분


향토적 서정에 뿌리를 두고 삶의 근원적 의미를 담담하게 노래하는 이상국 시인. 사진 동아일보DB
향토적 서정에 뿌리를 두고 삶의 근원적 의미를 담담하게 노래하는 이상국 시인. 사진 동아일보DB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 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이상국 시 ‘혜화역 4번 출구’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은 사랑이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흐를 뿐 거슬러 오르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뒤집으면 오로지 부모이기에 가질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기도 하다.

여기 한 아버지가 있다. 강원 양양 출신의 사내다. ‘대지의 소작’인 그가 어느 날 서울의 한 원룸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다. 딸아이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아버지에게 침대를 쓰시라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젓는다.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세상의 부모들이라면 누구나 속으로 수없이 했을 말이다.

아버지는 일하는 사람이지만, 딸은 일하는 사람을 부리는 법을 배운다. 이 간극은 아버지가 속한 너른 대지와 딸이 몸을 둔 좁은 원룸의 차이만큼이나 넓다. 그러나 그 넓은 간극을 메우는 것은 아버지가 딸을 업고 밤하늘 아래서 불러줬던 노래다. “아빠 서울에 눈 와”라는 딸의 문자메시지에 아버지는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아라”라고 답 문자를 보낸다. 그럴 때 서울과 시골의 먼 거리, 아버지와 딸이 다르게 속한 시간은 단숨에 메워진다.

다시,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그건 부모가 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는 저를 업고/ 별 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라는 말은, 자식은 모른다 해도 부모이기에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어디 부모뿐일까. 그 자리에 있기에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게 있다. 그러니 알아주는 이가 없는 듯해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는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 이 가르침을 시인은 담담하게 일깨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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