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겨울 ‘호랑이 사냥’이 시작됐다. 임진·정유 7년전쟁 중 가장 잔인한 학살 행위로 조선인들에게 악귀(惡鬼)라고 각인된 ‘호랑이 가토(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는 작전이었다. 가토는 임진왜란 중 함경도에서 조선 호랑이 사냥을 즐겼고, 잡은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납하는 등 악명을 떨쳐 ‘호랑이 가토’로 불렸다.
호랑이 사냥꾼은 조명(朝明) 연합군. 명군 3만6000여 명과 명군의 각 부대에 분산 배치된 조선군 1만여 명이 몰이사냥에 나섰다. 명의 경리(經理) 양호와 제독 마귀, 조선의 도원수 권율 등이 몰이사냥의 도포수(都砲手)를 맡았다. 양호는 조명 연합군을 좌군과 우군, 중군의 3개 군으로 편성한 후 각 군문(軍門)에 전령을 띄웠다.
“마땅히 먼저 청정(淸正·가토)을 공격하여 적의 오른팔을 끊어야 할 것이다.”(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양호는 이번 공격의 목적이 경상도 울산성(울산왜성 혹은 도산성으로도 불림)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오른팔’ 가토를 제거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했다. 여러 왜장 중 사납고 포악하기로 유명해 명군 장수들조차 맞서기를 꺼리던 가토를 우선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용맹스러운 가토와 그 휘하 군사의 붕괴는 왜군 전체의 전의(戰意)까지 확실하게 꺾어버리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계산한 것이다.
울산성의 전략적 가치도 컸다. 울산성이 무너지면 직선거리로 50여 km에 있는 부산포의 왜군 본진까지 곧장 위협받게 된다. 조명 연합군이 울산에 이어 부산까지 장악할 경우,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전체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 자체 괴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부산은 왜군이 일본 본토를 오가는 전략 거점지이자 거의 유일한 퇴로이기 때문이다.
성동격서와 양몰이 작전
양호는 먼저 가토를 고립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좌군과 우군을 안동과 경주를 거쳐 울산으로 진격케 하는 동시에, 중군을 경상남도 의령 방면으로 보내 왜군이 다니는 주요 길목을 막도록 했다. 울산성을 공격할 때 다른 지역의 왜성에서 파견하는 지원군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양호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도 펼쳤다. 3군에서 기마병 1500명을 따로 차출해 천안ㆍ전주를 거쳐 호남 남쪽의 남원 방면으로 진군케 했다. 이들은 일부러 깃발을 크게 날리고 요란스럽게 북을 울려 남단의 순천 등지를 공격하러 가는 척했다. 이는 전라도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왼팔’ 고니시 유키나가를 견제함과 동시에 왜군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작전은 먹혀들어갔다. 그해 12월 22일 조명 연합군은 왜군이 어디를 공격당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에 울산성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23일에는 울산성 외곽을 지키는 왜군을 급습했다. 조선의 학자 이긍익은 당시 상황을 사서(史書)에 자세히 묘사했다.
“(명군의) 삼협장(三協將)이 함께 진군했다. 좌군은 (울산)반구정의 적굴을 포위하고, 중군은 (울산)병영 길에서 곧장 적진을 꿰뚫고, 우군은 태화강의 적진을 포위하였다. 양호는 몸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북을 치고 떠들면서 분발하여 공격하니 포성이 천지에 울렸다. 불화살 수백 개를 서로 호응하여 한꺼번에 쏘니 바람은 빠르고 불은 뜨거워 어지럽게 적의 막사를 태워서 검은 연기가 공중에 가득하였다. 승리의 기세를 타서 반구정·태화강의 두 적굴을 함락시키니 남은 적들은 겨우 살아서 도산(울산성)으로 도망갔다.”(‘연려실기술’)
전투의 서전에서 조명 연합군은 무려 1000급에 달하는 왜군의 수급(首級)을 챙기는 전과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은 왜군을 계속 강하게 압박했다. 울산성 외곽의 나머지 왜군들까지 양몰이하듯 울산성 안으로 몰아넣었다. 도망쳐온 왜군들은 서로 먼저 안전한 곳을 확보하려고 동료들끼리 자리다툼까지 벌였다.(게이넨의 ‘朝鮮日日記’)
울산성은 혼란의 도가니가 됐다. 당시 울산성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서생포왜성에 나가 있던 가토는 급보를 듣고 그날 밤 배를 이용해 부랴부랴 울산성으로 돌아왔다.
12월 24일 본격적으로 공성전이 전개됐다.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을 겹겹이 포위한 후 불화살과 대포 등으로 성을 공격했다. 불에 타 숨지는 왜병들이 속출했다. 흙과 목책으로 만든 최외곽 성벽인 소가마에(惣構)는 속속 무너졌다.
그러나 왜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울산성 내부가 너무 견고했다. 외성(外城)인 소가마에와는 달리 내성(內城)은 모두 돌로 축조돼 있었다. 내성 성벽은 험준한 지형지세를 적절히 활용한 덕에 조명 연합군이 성벽을 타고 넘기가 쉽지 않았다. ‘축성의 귀재’ 가토가 직접 설계하고 감독한 울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게다가 왜군들이 성벽 위에 방옥(성루)을 설치한 뒤 구멍을 이용해 조총을 마구 쏘아대는 통에 연합군의 피해가 적잖았다. 임진년(1592년)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왜성 공성전을 벌인 조명 연합군은 조선 및 중국과 너무 다른 왜성 구조에 당황했다.
하늘을 원망해야 하나?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12월 25일 오후부터 기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겨울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그해 겨울은 너무 추웠다. 거기에 비마저 내리자 성밖에서 노숙해야 하는 병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갔다.
왜군 쪽 상황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왜성의 왜군들이 불에 탄 쌀을 주워 먹고, 옷과 종이를 펴서 비에 적신 뒤 짜서 마시는 자가 많다는 내부 정보가 흘러나왔다. 울산성은 공사를 완전히 마무리하기 전에 조명 연합군이 들이닥친 바람에 왜군이 식량을 비축할 겨를이 없었다. 식수 사정은 더 최악이었다. 왜성 축성을 하면서 파놓은 성 외곽의 우물들을 조명 연합군이 봉쇄해버렸다. 사실상 성내는 식수 공급이 중단됐다.
성에 머물던 종군승 게이넨은 “이 성안에서 곤혹스러운 것은 세 가지뿐이다. 추위, 배고픔, 갈증이 그것이다”고 일기에 적었다.(‘朝鮮日日記’) 게이넨이 울산성에서 극락왕생을 준비할 정도로 성안은 죽음의 공포가 감돌았다. 왜병들은 얼마 못 버텨 성이 함락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일본 측 기록인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가 묘사한 당시 상황은 처참했다.
“적이 10일 동안 밤낮으로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퇴로를 차단하자 성안에 식량과 물이 떨어졌다. 병사들은 모두 종이와 벽의 흙을 긁어서 먹었으며, 소와 말을 잡아서 먹었다. 밤에 성밖으로 몰래 나가서 연못의 물을 마셨다. 연못에는 죽은 시체가 많아서 물이 더러웠지만 그냥 마셨다.”
당시 가토는 조총병에게만 하루에 생쌀 한 홉만 제공하고, 다른 병사들을 방치할 정도로 식량이 바닥났다. 그러나 왜군의 유일한 버팀목이던 조총병의 조총 탄약마저 거의 동났다.
울산성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토는 성이 함락되면 항복 대신 할복자살을 결심했다. 절체절명에 빠진 가토는 금과 은 등 각종 보배를 성밖으로 던져주면서 명군의 공격을 늦추거나, 양호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의 강화회담 진행을 핑계로 시간 벌기를 했다.(‘연려실기술’) 가토는 서생포왜성에서 울산성으로 들어오기 전 부산성의 왜군 본진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해둔 상태였다.
해가 바뀌어 1598년 1월 1일, 울산성의 왜군에게 기적 같은 일이 찾아왔다. 조명 연합군의 배후를 돌아온 모리 히데모토의 구원군과 가토 간 연락이 닿았다. 이튿날인 2일에는 서생포왜성을 비롯해 각 왜성에서 출발한 약 6만 명의 일본 구원군이 수륙(水陸) 양쪽을 통해 울산 인근에 도착했다.
날씨도 왜군 편이었다. 비가 계속되는 가운데 북풍이 세차게 불어 피할 곳이 마땅찮은 조명 연합군들은 몸이 얼어붙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군마(軍馬)도 굶주림과 추위로 폐사가 속출했다. 조명 연합군의 사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3일에는 왜군 구원군이 조명 연합군을 배후에서 야습하는 일도 발생했다. 결국 명군 지휘관 양호는 권율, 이덕형 등 조선 지휘관들을 불러 말했다.
“성이 험해서 함락시키기 어렵고 구원병의 세력은 크니 포위를 풀었다가 후일의 일을 다시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연려실기술’)
마침내 1월 4일 밤 양호는 진영을 경주 방면으로 철수했다. 전투 개시 때 위풍당당하던 명군은 퇴각 때는 오합지졸이 돼버렸다. 중구난방으로 도망치는 명군을 쫓아가 왜군들이 도륙을 했다.
12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아군과 적군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만8000명의 왜군 중 전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원이 수백 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왜군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일본 측 기록물인 ‘朝鮮物語’에는 전사자 2800명이라고 기록)
명군의 경우 1400명이 전사했고, 3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연려실기술’) 일본 측 기록은 조명연합군이 1만여 명 넘게 전사했다고 적고 있다.(일본 아사노 가문 ‘淺野家文書’·‘朝鮮物語’) 전사자 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명연합군 중 조선군의 피해가 명군보다 더 컸음은 분명하다. 경상좌도 절도사 성윤문 등은 “(조선) 병사들이 건초와 방패를 메고 성 아래로 진격해 적진을 불태우는 화공(火攻)에서 거의 다 전사했다”(‘선조실록’)고 보고했다. 양호가 연합군에 대한 지휘권을 이용해 가장 위험한 돌격 선봉대에 조선군을 배치한 결과였다.
울산성의 교훈
기자는 실패로 끝난 ‘호랑이 사냥’ 전투의 현장인 울산성(울산 중구 학성공원)을 지난주 찾았다. 흔적만 남은 성벽과 기단들을 근거로 당시의 왜성을 추정해보았다. 울산성은 동남방으로 흐르는 태화강을 옆으로 끼고 있는 높이 50m의 학성산을 성으로 꾸민 형태였다. 산 정상에서는 태화강과 울산 시내 대부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가토는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허문 돌을 옮겨와 울산성을 쌓으면서 약 1만6000명의 조선인과 일본인들을 동원했다. 왜성은 조선 성과는 모양과 구조가 달랐다. 조선 성이 대부분 한 겹의 성벽으로만 이뤄진 반면, 울산성은 내성을 세 겹(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으로 둘렀고 외곽으로 외성인 소가마에를 만들어 놓은 형태였다.
공원으로 꾸며진 산 정상부의 혼마루(제1성)에 그 핵심인 천수각 터가 보이지 않았다. 울산성을 마무리 짓기 전에 조명 연합군이 공격해와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 아래로는 그 높이와 지형에 맞추어 니노마루(제2성·해발 35m), 산노마루(제3성·해발 25m)가 지어졌다.
불과 40여 일만에 완성됐지만 전체 둘레 1300m, 높이 10∼15m에 이르는 성벽은 성 밑에서 쏘아 올리는 대포 공격에도 끄떡없었을 것이다.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지에서 홀로 돌출한 산에 성을 지은 만큼 주변이 차단될 경우, 식량과 무기 등이 떨어지게 되면 고립무원이 된다. 가토는 울산성에서 이런 약점을 처절하게 경험한 뒤 일본에 돌아가 120개의 우물과 고구마줄기로 엮은 다다미 등 비상식량을 갖춘 구마모토성을 지었다.
그런데 명군 지휘관들은 일반 성을 상대하듯 왜성을 너무 쉽게 보았고 자만심에 빠져 다른 전략은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았다. 무턱대고 돌진하다가 조총에 맞아 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울산성은 1598년 9월 2차 전투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도 조명 연합군은 희생만 낸 채 성벽을 넘지 못했다. 숱한 조선군과 명군의 희생에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울산성은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가토가 일본으로 퇴각하면서 성을 불태우는 것으로 스스로 운명을 다했다. 울산성 전투의 성과라면 이후 전체 왜군의 전투의지가 현저히 꺾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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