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일 이틀간 기자는 배를 타고 서남해의 바다를 누볐다. 420년 전 바로 이 무렵,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부단히 움직이던 이순신의 해상 길을 복원해 보는 취재였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18일(음력) 남해안의 장흥 회령포(회진항)에서 13척의 배를 수습한 뒤 그 한 달 후인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이 기간은 이순신이 조선수군의 꺼져가던 마지막 불씨를 되살려내려 안간힘을 쓴 단계였다. 실제적인 조선수군 재건은 명량해전 이후부터다. 이순신은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후 비로소 조선 수군 양성 및 왜군과 전면전을 치르기 위한 해상 진지 구축 작업을 벌일 수 있었다.
국내 첫 시도인 이순신 수군 뱃길 복원 탐사의 시작점은 명량해협 현장인 울돌목이었다. 신안군(군수 고길호) 행정선인 전남 213호(선장 김병직)는 평균 25노트(knot·1노트는 1시간당 1852m의 속력)로 파도를 가르며 출항했다. 선상에서 관찰하는 바닷길과 지형지물은 육지에서 볼 때와는 달랐다. 바닷물의 깊이, 밀물과 썰물의 조류, 바람의 방향 등이 배의 속도와 방향에 미치는 영향을 체감할 수 있었다. 420년 전 이순신은 이런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해상 작전을 구상했을 것이다.
서해안으로 작전상 이동
당시 이순신은 명량해협에서의 승리 직후 재빨리 울돌목을 빠져나와 서해로 이동했다. 13척의 판옥선으로 수백 척에 달하는 일본 전함을 이긴 것은 이순신의 표현처럼 ‘천행(天幸)’에 가까웠다. 일본 수군이 전력을 재정비해 반격해올 경우 수적 열세에 있는 조선 수군이 또 이긴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9월 16일 명량해전을 끝낸 무렵인 신시(申時·오후 3∼5시)에 당사도(신안군 암태면)로 출발했다. 당시 판옥선의 최대 선속은 6노트(시속 11km). 명량해협에서 당사도까지는 직선거리로 35km 정도이니, 서너 시간을 부지런히 노를 저어 해가 떨어진 다음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당사도에서 식수를 공급받고 밤을 지새웠다. 당사도 방죽골에는 이순신이 물을 제공받았다는 우물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순신은 이튿날인 17일 다시 북쪽으로 30여 km 떨어진 어을오도(어의도·신안군 지도읍)까지 이동했다. 서해 연안에서 30년간 배를 다뤄온 김병직 선장은 “조선수군은 조석간만의 차로 6시간마다 바뀌는 물때(들물과 썰물) 중 낮 시간대의 들물 때를 이용해 하루에 30여 km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순신이 어의도에 도착하자 명량해전에서 수군을 도운 300여 척의 피란선이 먼저 와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이틀을 머물면서 나주 진사 임선, 의병장 임환 등으로부터 승전 축하와 함께 군사들에게 먹일 양식을 제공받았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이순신은 어의도를 출발해 칠산 앞바다(영광군 낙월면, 9월 19일)-법성포(영광군 법성면, 19일)-홍농(영광군 홍농읍, 19일)-위도(부안군 위도면, 20일)를 거쳐 계속 북상했다. 9월 21일에는 고군산군도(군산시 선유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고군산군도에 머물면서 건강에 이상이 왔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실 정도로 흐르고 탈진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난중일기’) 반년 남짓한 기간에 투옥과 고문, 모친의 죽음, 무리한 연안 답사와 목숨을 건 전투를 연이어 겪다보니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고 자주 아팠다. 한번 앓기 시작하면 사나흘씩 몸져눕기 예사였다. 그러나 며칠의 휴식도 잠시뿐, 이순신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전선을 정비하고 수군 전열을 가다듬었다.
기자는 이순신의 항로를 따라 고군산군도의 선유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12일간 머물면서 나주 목사와 무장 현감 등을 만나고, 임금에게 올리는 명량해전 승첩 장계를 작성했다.
선유도에 머물던 이순신에게 아산 본가의 처참한 소식이 전해졌다. 아산의 고향집이 육지의 왜적에게 분탕질을 당하고 잿더미가 돼 남은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일)
강항의 꾀, 이순신을 살리다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떠나 고군산도에 머물기까지 보름 남짓한 기간, 일본 수군은 전선을 정비한 뒤 곧장 조선 함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일본 수군의 동태는 강항의 ‘간양록’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강항은 전쟁 중 일본에 잡혀간 뒤 학문을 전파해 ‘일본 주자학의 개조(開祖)’로 불린다.
강항은 일가족을 배에 태워 이순신 진영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이순신의 뒤를 바짝 쫓던 왜군은 10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해남의 전라우수영을 거쳐 서해로 북진하고 있었다. 강항은 9월 23일 영광군 칠산 앞바다에서 도도 다카도라의 수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튿날인 24일 무안의 해안으로 끌려왔을 때는 바다에 왜선이 가득했다. 강항은 왜군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승선 인원 중)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로 서로 뒤섞여 있었다. 양 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 조수도 역시 흐느꼈다.”(‘간양록’)
왜군 장수는 강항이 한문에 밝고 지체 있는 신분임을 파악하고는 통역을 불러 신문했다. “수로(水路)의 대장(이순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강항이 답했다. “지금 태안 안행량(安行梁)에 있으며 해마다 배들이 표류되고 난파되는 등 매우 험난한 수로다. 명나라 수군 1만여 척이 이곳을 가로막고 있다. 유선(遊船)이 이미 군산포까지 와 있고 통제사(이순신)도 합세했다.”(‘간양록’)
강항의 말에 왜군들은 그만 기가 꺾였다. 사실 당시 명나라 수군의 조선 파병은 소문만 무성했을 뿐 본진은 중국에서 출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왜군이 마음만 먹으면 영광에서 불과 50km밖에 안 떨어진 고군산도까지 하루만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군은 남쪽으로 배를 되돌렸다. 조명 연합 수군이 군산포까지 내려와 있다는 강항의 거짓 설명에 왜군이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인 듯하다.
대신 명량해전 참패 소식에 화가 난 육지의 왜군은 수군과 합세해 조선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보복을 했다. 영광, 무안, 해남 등지를 완전히 재로 만든 것은 물론이고 충청도 아산의 이순신 집까지 달려가 화풀이를 했다.
팔금도의 한
이순신 역시 육지 쪽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10월 3일 고군산군도를 출발해 다시 남하했다. 북상했던 해로의 역순으로 부안 변산-영광 법성포-어의도(8일)를 거쳐 9일에 해남 전라우수영에 도착했다. 23일 만에 다시 찾은 우수영 성 안팎은 인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의 자취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일 뿐이었다.(‘난중일기’)
황폐화된 우수영에서 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던 이순신은 10월 11일 신안의 안편도(발음도)를 찾았다. 이순신은 이 섬에 18일간 머물면서 염전을 개발해 질 좋은 소금을 구워 파는 등으로 모자란 수군 군량과 전비를 마련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안편도가 어디인가를 놓고 그간 장산도(신안군 장산면)와 팔금도(신안군 팔금면)라는 두 가지 설이 대립했다. 장산도는 산성(대성산성)과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순신이 이곳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반면 팔금도는 이순신이 섬 위의 산에 올라 지형을 살핀 기록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기자는 이순신의 뱃길 감각으로 안편도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이순신은 해남 우수영에서 사경(四更·새벽 1∼3시)에 판옥선에 올라 낮에 안편도에 도착했다.(‘난중일기’) 새벽 3시경에 출발했다고 치면 7∼8시간 동안 천천히 항해해 낮(오전 11시∼오후 1시경)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해남 우수영에서 불과 10여 km 떨어진 장산도는 판옥선의 6노트 속력이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갈 거리다. 만일 해남에 왜선이 나타날 경우 들물 때에 일시에 습격당할 수 있는 위험거리이기도 하다.
반면 팔금도는 우수영에서 25km 남짓 떨어진 안전거리에 있다. 이순신의 성격상 적 공격권내의 위험한 거리는 철저히 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판옥선의 하루 평균 항해가 30여 km인 점, 당시 판옥선의 이동 시간을 계산해보면 팔금도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 이순신은 안편도의 산에 올라가 정상에서 지형을 살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동쪽 전망에는 앞에 섬이 있어서 멀리 바라볼 수 없으나,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의 월출산이 통하였고, 서쪽으로 비금도에 통하여 시야기 환하게 트였다.”(‘난중일기’)
실제로 팔금도 원산리의 채일봉(150여 m)에 올라 주변을 조망했더니 이순신의 표현 그대로였다. 북쪽으로 영암의 월출산까지 저 멀리 보였다. 김병직 선장은 “조선수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팔금도가 거리나 위치로 보아 배를 숨기기에 좋은 장소”라고 말했다. 그는 팔금도에서 바람이 없고, 물길도 순한 특정 지점을 배를 대기에 적당한 장소로 꼽았다. 바로 팔금도 원산마을이었다.
이순신은 안편도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10월 14일 저녁, 겉면에 ‘통곡(慟哭)’이라는 두 글자가 쓰인 편지를 받았다. 이순신은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순신이 부인 방씨와의 사이에 낳은 3형제 중 막내아들 면이 왜군에게 살해됐다는 편지였다. 약 2주 전 받았던 아산 집 관련 1보에는 없던 비보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발했구나. 슬프고 슬프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난중일기’)
면은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하인들을 보호하며 보복을 하러 온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의 건강은 최악으로 나빠졌다.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 그러나 10월 29일 이순신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목포의 고하도로 남하했다. 해상진지를 짓기 위해서였다. 기자도 이순신이 108일간 머문 고하도로 갔다가 내친김에 인근의 진도까지 가보았다.
왜군 시신 묻어준 진도 사람들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머물렀던 진도 지역도 왜군의 보복에서 비켜나지 못했던 곳이다. 왜군은 명량해전 다음 날인 9월 17일 진도로 쳐들어가 많은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다. 기자는 그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정유재란 순절묘역’(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지방도로 옆 산기슭)을 참배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약 5km 떨어진 왜덕산(倭德山)을 찾았다.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의 아담한 야산인 왜덕산에는 얼핏 보면 마을의 공동묘지가 조성돼 있는 듯했다. 420년 전 이 마을 사람들은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들의 주검이 남동 조류를 따라 떠밀려오자 일일이 시신을 수습해 양지 바른 언덕에 묻어주었다.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로 왜덕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다.
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 씨(진도문화원 부원장)는 “왜덕산에는 원래 100여 기의 묘가 있었는데, 개간과 도로공사 등으로 훼손돼 현재 50여 기의 묘지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에게 전멸한 일본 수군의 선봉은 대부분 구루시마 형제(미치후사, 미치유키) 휘하의 해적 출신들이었다. 구루시마 수군 후손들의 모임인 구루시마보존현창회(來島保存顯彰會) 회원들을 비롯해 일본인들이 근래 들어 참배차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왜덕산의 왜군 무덤을 보노라니 일본 교토에 있는 조선인 코무덤이 생각났다(본보 9월 2일자 22면 기사 참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9월 28일 교토에 베어온 조선인의 코로 봉분을 만들면서 자신의 전공을 자랑했다. 바로 그 무렵 진도 사람들은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군들의 시신을 거두어 일본이 바라보이는 남쪽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주고 있었다. 왜군의 무차별한 학살로 떼죽음을 당했으면서도 조선 사람들은 가해자의 마지막 길에 덕을 베풀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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