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면, 그 아들은 자기뿐 아니라 어머니의 존재도 역사에 남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그렇고, 어머니 홍주 백씨와 아들 석봉 한호가 그렇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39·사진)가 있었다. 아니, 곽 역사는 백범 선생뿐 아니라 모든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어머니였다.
황해 장연군에서 태어난 곽 여사는 1922년부터 아들 내외와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살았다. 그러다 1924년 며느리 최준례 여사가 숨을 거두자 우유를 먹이고 빈 젖을 물려가며 손자 둘을 키웠다.(이렇게 키운 둘째 손자 김신 선생은 1960년부터 3년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다.)
하지만 굶주리고 있는 건 비단 어머니를 여읜 세살 배기 하나가 아니었다. 백범 선생은 자서전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도 상하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還國)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을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하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된 신(信)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 어머님께서 담아두신 우거지 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당시 66세였던 곽 여사가 혼자 귀국길에 올랐지만, 이런 상황에서 노자(路資)를 넉넉히 드리기는 불가능했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어머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실 때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해, 겨우 인천에 상륙하시자 여비가 떨어졌다. 떠나실 때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린 바 없건만, 어머님은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신문에 난 상하이 소식을 보고 벌써 알았다면서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서 드렸고,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했다.”
당시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서 봤다는 상하이 소식이 신문에 실린 게 바로 1924년 오늘(11월 6일)이다.
“(곽 여사가) 근일에는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준비 중이라는데 상하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 사람 없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무지 듣지 않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상하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해 할 수가 없다 하며, 그 부인은 조선에 나간대도 갈 곳이 없으므로 그의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사람들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
하지만 ‘고국강산에 묻히겠다’던 곽 여사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배후로 아들이 지목 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와 ‘임정의 식모’를 자처했다.
곽 여사는 이후 임정이 여러 번 자리를 옮기던 중 병을 얻어 1939년 끝내 아들이 소원을 이루는 걸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아들의 소원은 물론 ‘대한 독립’이었다. 곽 여사는 처음에는 충칭(重慶)에 묻혔지만,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곽 여사는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동아일보와 백범 선생의 인연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0년 8월 10일 때 강제 폐간 당했던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1일 중간(重刊)할 때도 백범 선생은 경세목탁(警世木鐸·‘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어라’)이라는 붓글씨를 보내 이를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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