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금년 6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구요.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예로 드는 작품이 바로 ‘사랑 손님과 어머니’다. (나중에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 제목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다.) 이 작품은 서울 사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도 손꼽히지만 정작 이 작품을 쓴 주요섭 선생은 평양에서 자랐다.
주 선생은 평양에서 숭실중학을 다니다 일본 도쿄(東京) 야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편입한다. 3·1 운동 이후 귀국한 주 선생은 동아일보 평양 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다 중국 상하이(上海) 후장대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했다.
후장대 생활을 마치고 미국 스탠퍼드대로 건너 간 주 선생은 1930년 2월 6일부터 동아일보에 ‘미국 문명의 측면관(側面觀)’이라는 글을 8회에 걸쳐 실었다.
스탠퍼드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에도 ‘시험 철폐와 그 대책’ 시리즈를 20회, ‘의무교육을 목표’라는 시리즈를 12회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석사 학위를 따고 1931년 10월 귀국한 그는 아예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 편집 책임자가 된다.
주 선생이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나서 6개월 뒤에는 김자혜 기자가 신동아에서 일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나중에 부부가 된다. 당시 주 선생은 이혼을 한번 경험한 뒤였다.
당시 신동아 기자였던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은 1991년 신동아에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 사내에서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가 퇴사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고 회상했다. 주 선생은 1934년 8월 회사를 떠나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던 푸런(輔仁)대 교수가 된다.
동아일보는 1934년 9월 28일자 석간 2면에 주 선생의 푸런대 부임 소식을 전했고, 주 선생도 1935년 2월 17일부터 156회에 걸쳐 장편 소설 ‘구름을 잡으려고’를 연재하는 등 이후에도 계속 동아일보에 글을 썼다. 동아일보와 주 선생의 인연이 끝난 건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1972년 오늘(11월 14일)이었다.
이 신안 주씨 가문에서 주 선생만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건 아니다. 그의 친형인 주요한 선생도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1913년 노벨 문학상은 탄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타느 타고르가 1929년 동아일보를 통해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보낸 시 ‘동방의 등불’을 번역한 이가 바로 주요한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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