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당신 발밑으로 가라앉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 당신이 눈감으면 사라지는 그런 이름이다 내리던 비가 사라지고 나는 점점 커다란 소실점 복도가 조금씩 차가워진다 거기 당신이 서 있다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그것은 모르는 얼굴이다 가시만 남은 숨소리가 있다 오직 한 색만 있다 나는 그 색을 사랑했다 당신은 내 오른쪽의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내 머리 위에 흔들리는 이가 있다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
-유희경 시 ‘당신의 자리’ 신촌기차역에는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작은 서점이 있다. 시집만 파는 서점이다. 이 서점의 주인은 유희경 씨. 그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맞춤한 시집을 권해준다.
그는 내년이면 등단 10년이 되는 시인이기도 하다. 2011년 펴낸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는 ‘불행한 서정의 귀환’(평론가 조연정)이라는 평과 함께 조명 받았다. ‘불행한 서정’이란, 이를테면 ‘당신의 자리’ 같은 시편에서 쓸쓸하게 드러난다. 이 시에선 ‘나’와 ‘당신’이 등장한다. ‘나’는 당신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인데, ‘당신’은 나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 나는 그런 당신의 발밑으로 가라앉고, 당신이 눈감으면 사라져 버린다. 당신이 있어야 내가 있고, 당신을 통해서만이 내가 보인다.
사랑이 이런 것이다. 당신이 있지 않으면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 이것이 시인 유희경의 ‘사랑의 정의’다.
이 시에는 마침표가 없다. 쉼표 하나만 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마침표가 없길, 사랑이 마쳐지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읽힌다. 모든 사랑하는 이들의 간절함이기도 할 것이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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