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마지막으로 한 번만” 속물이 되기 직전 청춘은…‘무진기행’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4일 18시 24분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씨. 동아일보DB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씨. 동아일보DB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중 일부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는 구절을 들으면 누군들 ‘무진’을 떠올리지 않을까. 숱한 청춘들이 성경처럼 외었을 이 문장.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여기 한 30대 사내가 있다. 남편과 사별한 여성과 결혼한 지 4년. 그 아내와 장인의 도움으로 제약회사의 중역에 오를 참이다. 이 간단한 묘사가 가리키는 건 ‘속물’, 청춘의 반대말이다.

그가 무진으로 간다.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무진에서 후배와 중학교 동창과 미혼의 음악교사 하인숙을 만난다. 무진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하인숙이 그를 유혹한다. 하인숙과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그는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는다. 청춘의 공간인 무진을 떠나 세속의 도시인 서울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하인숙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썼다가 곧 찢어버리고 서울로 떠난다.

이 소설이 청춘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작품을 읽는 그 청춘들 또한 곧 속물이 될 것임을 감지하고 있어서다. 화자가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이라고 되뇔 때 책을 읽는 젊은이들 역시 똑같이 되뇌게 된다. 유행가, 배반, 무책임, 그리고 외롭게 미쳐가는 것에 마음을 내주겠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긍정하자고 하는 순간, 속물이 되기 직전의 그 순간, 청춘은 참담하게 빛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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