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 암살 계획을 상해총사령관 경찰이 탐지하고, 17일 오후 6시 25분 중국요리점 ‘송강춘’에서 특고과(특수고등경찰과) 무장경관 십수 명이 그 집을 포위했다. 원심창, 이강훈, 백구파 3명을 체포하고, 암살용 폭탄 2개와 권총 3정을 압수했다.”
1933년 3월 21일자 2면 ‘유길(有吉) 공사 암살계획 밀의현장을 습격’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의 기사다. 이 사건은 당시 중국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공사를 암살하려던 ‘육삼정 의거’다. 동아일보 보도처럼 일본 경찰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결국 미완에 그쳤다. 그러나 당시 밀정이 누구였는지 밝혀지지 않아 학계의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최근 육삼정 의거 실패가 일본 경찰이 계획한 ‘함정 수사’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가 나왔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이달 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에 실을 논문 ‘1933년 有吉明 공사 암살미수 사건의 전말’이다.
이 연구는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뉴채널’의 김광만 PD가 2014년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서 입수한 ‘유길 공사 암살음모사건 내사의 건 보고’ 문서를 토대로 이뤄졌다. 이 보고서는 당시 일본 영사관 소속 야마다 가쿠베에 순사가 경찰서장에게 보고한 극비 문서다.
입수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당시의 상황은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밀정’(2016년)보다 더 치밀했고, 안타까웠다. 일본의 상해총영사관에서 정보경찰로 활동한 가쿠베에는 원심창(1906∼1973)이 주도한 의열단체 흑색공포단(B.T.P.)의 존재를 정보원을 통해 파악한다.
흑색공포단에는 동아일보 김화지국을 운영하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청뢰 이강훈(1903∼2003)과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3의사’로 불리는 구파 백정기(1896∼1934·별칭 백구파) 의사 등이 참여했다.
일본 경찰 측은 이들이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성향이란 점을 활용해 당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일본인 ‘오키’라는 인물을 이중첩자로 보낸다. 오키는 “3월 17일 ‘육삼정’이란 식당에서 아리요시 공사가 참여하는 연회가 벌어질 것”이라는 고급 정보를 흘린다. 흑색공포단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백정기가 경호원을 사살하고, 이강훈이 공사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다”라는 암살계획을 세운다. 이 도시락 폭탄은 백범 김구로부터 전달받은 것으로,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에서 사용한 종류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덫이었다. 거사 당일 현장에는 아리요시 공사는 없었다. 그 대신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본 고등경찰들이었다. “낙화생(땅콩)을 먹으면서 기다리다가 원심창이 손짓을 하는 순간 일이 잘못됐다고 느꼈다. 그 순간 영사관원 10여 명이 고함을 치며 다가왔다”라며 이강훈은 당시를 회고했다.
이들은 일본의 나가사키 재판소로 끌려가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원심창과 백정기는 무기징역, 이강훈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원심창(건국훈장 독립장)과 이강훈(제10, 11대 광복회장)은 광복을 맞아 석방됐지만 백정기는 1934년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이들은 밀정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박 교수는 “잠행성을 생명으로 하는 밀정의 특성상 자료 확보가 어려워 관련 연구가 거의 없었다”라며 “밀정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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