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인생 44년, 독자앞에 서는 게 이렇게 긴장되긴 처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8일 03시 00분


장편소설 ‘유리’로 돌아온 ‘영원한 청년 작가’ 박범신

박범신 소설가는 평일은 충남 논산시의 집필실에서, 주말에는 가족이 있는 서울에서 보낸다. 그는 “가난한 밥상, 쓸쓸한 배회가 논산에서의 삶이다. 소설은 내 안의 우울함을 밀어내고 에너지를 솟구치게 만들어 나를 살게 한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박범신 소설가는 평일은 충남 논산시의 집필실에서, 주말에는 가족이 있는 서울에서 보낸다. 그는 “가난한 밥상, 쓸쓸한 배회가 논산에서의 삶이다. 소설은 내 안의 우울함을 밀어내고 에너지를 솟구치게 만들어 나를 살게 한다”고 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그의 왼쪽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인터뷰를 한다고 생각하니 많이 긴장되더라고요.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에 실핏줄이 터져 있었어요.”

44년째 작가 생활을 하며 숱하게 인터뷰를 해 온 소설가 박범신 씨(71)는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43번째 소설 ‘유리’(은행나무·사진) 출간을 맞아 27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그랬다. 지난해 10월 성추문 논란에 휩싸인 후 공식 활동을 재개한 그는 단어 하나를 말할 때도 한참 동안 생각했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이들 사이에서는 엇갈린 주장이 나왔다.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더 조심하고 더 삼가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자들에게 받았던 과분한 축복에 비하면 작은 형벌이니까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동아시아 일대를 부유한 방랑자의 여정을 그린 ‘유리’는 지난해 3월부터 7월까지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됐다. 구독자는 9만여 명에 이르렀다. 지난해 10월 한국과 대만에서 동시에 출간할 예정이었지만 논란이 일면서 연기됐다. ‘유리’는 ‘유리걸식(流離乞食)’에서 딴 이름. 구렁이, 은여우, 원숭이, 햄스터가 유리와 여정을 함께하고 대화도 나누는 판타지적 분위기에, 개개인의 삶이 역사적 사건과 숨 가쁘게 맞물리면서 읽는 이를 빠져들게 만든다.

그는 퇴고를 거듭하고 위안부 여성의 고통과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담아 200여 페이지를 더 썼다. 작품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이 밝아지며 말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추가 원고를 썼던 8월은 지난 1년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글쓰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으니까요.”

후반부에 위안부 출신의 점순을 등장시킨 건 유리가 정처 없이 떠돈 동아시아 일대에서 당시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존재가 위안부였기 때문이다. 유리가 간절히 찾아다닌 소녀 ‘붉은댕기’는 위안부로 끌려가 유리와 헤어지게 된다.

“점순은 ‘붉은댕기’의 현신이에요. 유리와 마지막에 서로 위로를 주고받게 하고 싶었어요.”

그는 젊은이들에게 지난 백 년 동안 극심한 수난을 겪은 우리 역사를 무겁지 않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당시는 소통이 불가능했던 ‘짐승의 시대’였죠. 유리가 동물들과 대화하게 되는 건 제대로 된 말을 나눌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을 가상 국가 이름으로 바꾼 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상상력에 제한을 받지 않기 위해 만든 장치고요.”

그는 소설이 정글과도 같기에 쓸 때마다 자주 길을 잃어버리고 최소한 두세 번은 위기를 맞는다고 했다. 하지만 ‘유리’는 앞부분을 시작하자마자 길이 확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과 내가 한 덩어리가 된 것 같았어요. 내 속에서 뿜어져 나온 것을 춤추듯 써내려가는 경험을 하며 비로소 작가가 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리’는 일제강점기부터 유신 시대까지의 역사를 비춘다. 그는 ‘유리’의 아버지가 살았던 1800년대 후반과 유신 시대 이후의 한국 사회를 다루는 작품을 각각 써서 3부작을 완성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포털 사이트에 처음 소설을 연재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적극적이다.

“후배들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넓혀 주고 싶어요. 자신이 쓴 문장이 소중하면 길거리든 어디에서든 보여주며 독자들을 찾아 나서야죠.”

문장 역시 여전히 감수성과 예민함으로 충만하다.

“의도한 건 아니에요. 새로운 작품을 쓰려면 지금까지의 작품을 부정해야 하니까요. 저는 미완의 작가예요.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고요.”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진지하게 말하는 그는 영원한 ‘청년 작가’였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박범신#장편소설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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