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옛 청와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대화하는 가인 김병로. 그는 헌법정신을 바탕으로 정권의 독재화에 맞섰고, 대법원장 퇴임 뒤에도 군정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야권 통합에 힘썼다. 동아일보DB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사, 광복 뒤 반민특위재판부장, 붓으로 대한민국 법률 초안을 써내려 간 법전편찬위원장, 정권의 독재화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지켜낸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1887∼1964) 없이 대한민국 사법부의 역사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김병로의 법률가적 면모에 집중한 일대기 ‘가인 김병로’(박영사)가 최근 발간됐다. 저자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1995년까지 대법원이 있던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27일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진노를 샀던 판사들이 김병로 대법원장 재임 시기(1948년 8월∼1957년 12월)에는 자리와 소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집권 연장 목적의 개헌에 반대하던 서민호 의원이 총격 사건으로 구속되자 안윤출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구속집행정지를 결정해 서 의원을 석방했다. 그러나 시위와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결정에 불만을 표하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말했다.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시오.” 이승만 대통령은 김 대법원장이 못마땅해 장관에게 “요즘 헌법(김병로) 잘 계시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옛 대법원) 앞에 선 한인섭 서울대 교수.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한 교수는 “김병로가 대법원장이었다면 1959년 조봉암의 사형 판결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며 “김병로는 힘없는 신생 국가의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소신을 외풍으로부터 지킨 법조 윤리의 화신”이라고 말했다.
그 바탕은 극도의 청렴함과 강직함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 판사를 김 대법원장이 “나도 죽으로 살고 있어요. 서로 죽을 먹어가면서 일해 봅시다”라며 만류한 일화도 전해진다.
920쪽에 이르는 이 책은 법학 지식을 바탕으로 가인의 활동과 고뇌를 추적했다. 가인이 독립운동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론했는지도 세밀하게 담겼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내내 광복 뒤 법률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일례로 피고인의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구속기간을 제한하는 한국 형사소송법은 일본 미국 독일 등에도 유례가 없다. “독립운동가들이 붙잡히면 판결 뒤 복역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무기한 연장되는 수사와 재판입니다. 2, 3년 구속돼 있는 동안 고문당해서 죽거나 몸과 마음이 상합니다. 그들을 변호했던 김병로 선생이 6·25전쟁 중 대한민국 형사소송법 초안을 만들며 집어넣은 것이지요.”
한 교수는 인터뷰에서 가인과 동아일보의 깊은 인연도 소개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와 가인은 더없이 가까웠지요. 일본 유학 뒤 가인은 변호사, 고하는 언론에서 활약하며 상승작용을 했습니다. 언론은 독립운동가가 붙잡혀도 피고인을 직접 접촉 못 했지요. 가인이 변호하며 얻은 정보를 언론이 크게 보도하며 독립운동을 나라 전체에 알렸던 겁니다. 광복 뒤에도 헌법정신을 바탕으로 정권을 비판하는 가인의 기고가 동아일보에 제일 많습니다.”
한 교수는 “가인은 안창호, 김성수, 이인 등 지도자는 물론이고 홍명희, 허헌, 여운형 등 우파 중도파 좌파와 두루 절친했다”며 “한결같이 정치적 좌우를 가리지 않고 통합노선을 추구했다”고 강조했다.
자료 수집에만 10년이 걸렸다. 그동안 방학 때만 되면 ‘20세기에 들어가’ 살았고, 일제강점기 고문 관련 기사를 하도 읽어 자신도 몸에 통증이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한 교수는 “김병로 선생은 한국 법제, 사법, 법률, 윤리의 초석을 놓은 법의 거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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