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출판사와 서점 대표, 학자, 작가, 평론가 등 48명에게 ‘내가 생각하는 올해의 책’을 5권씩 선정해 달라고 청했다. 거론된 책은 127권. 그중 특히 많은 표를 얻은 10권을 소개한다. 당면한 현상의 사회, 역사, 기술적 의미를 다룬 책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오랜 세월 끊임없이 수많은 책을 만들어온 사람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들이 책을 통해 바라본 2017년의 모습은 이랬다. 한 해를 정리하는 독자들의 시간을 채워줄 알찬 길라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동아시아·320쪽
18명이 택한 1위다. 2위와 7표 차.
저자(사진)는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다. 연세대 의대,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보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충남 천안 소년교도소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한 뒤 결혼이주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해치는 요인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역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서문에 그는 “의료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사회 구성원의 건강한 삶에 대한 충분한 해법을 얻을 수 없다. 허리가 아파도 병가를 쓸 수 없는 근무자에게 병원 의료기술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썼다. 실업 관련 정책의 부재, 부족한 복지 예산, 고용불안을 짊어진 위험한 작업환경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건강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는 얘기다.
책에는 그가 병원 밖에서 우리 사회 아픈 사람들의 병인(病因)을 더듬어 찾아나간 경험담을 엮었다. 걸음걸음 아프게 읽히는 문장이다. 상시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제조업 노동자에게 ‘10년 뒤 암 발병률’을 들이미는 금연정책의 허상, 거대 기업의 이윤 추구에 반하는 연구를 시도하는 학자의 고충, 인종에 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 등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말랑말랑한 감상의 기색은 없다.
저자는 1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탈고하기 전 반드시 소리 내서 읽어보고 주변의 피드백을 받았다. 연구 자료가 바탕이 된 글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쌓은 연구를 토대로 쓴 글이다. 분석을 위해 공감하며 나도 힘들고 아팠다. 되짚어 글로 옮기는 과정 역시 괴로웠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위안을 얻었다. 다같이 건강한 사회를 위해, 학자로서 더 탄탄한 근거를 쌓아 나가겠다.”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김영사/630쪽
출간을 맞아 7월 한국을 찾은 저자는 “지금의 인류는 기술혁신에 매달리다가 인간의 마음이 지닌 잠재력을 영영 잃을 위기를 맞았다”고 경고했다. 7만 년에 걸친 ‘인류의 시대’를 관통해온 인본주의 가치관이 곧 무너지고 그 빈자리를 알고리즘 데이터가 메우리라는 것. 기술의 힘을 빌려 스스로를 신(神)의 지위에 올리려 하는 인류 사회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전작 ‘사피엔스’를 뛰어넘는 호응을 얻었다.
“인류의 종말이 예감되는 이 시대, 누구도 이 책을 우회할 수 없다.”(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인간의 미래를 탐구하는 명철한 지식인을 대면하는 기쁨과 곤혹스러움을 동시에 안긴다.”(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아날로그의 반격
◇데이비드 색스/어크로스/448쪽
“인공지능 시대는 아날로그의 본질이 새롭게 발견돼 디지털 기술과 함께 귀환하는 시대다. 그 부활의 현장에서 길 잃은 인간에게 폭풍 같은 통찰을 전한다.”(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희소성의 원리에 비추어 도시문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알려준다.”(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디지털 미디어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된 세상. 그 지점에서 변화의 길을 모색할 실마리를 아날로그 미디어의 재발견을 통해 짚어 나간 책이다. 로모그래피, 레코드판, 보드게임 등 구시대의 유물이 복원돼 활발하게 유통되는 현상으로부터 디지털 환경에 피로해진 사람들의 변화된 욕구와 가치관을 읽었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문학동네/272쪽
저자가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펴낸 소설집. 여섯 편의 단편을 묶었다. 대표작 한 편의 제목을 내세우는 관행과 달리 책 제목을 따로 지었다.
어린이집 차 사고로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청년, 관심의 포장을 뒤집어쓴 경계의 시선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다문화 가정 어린이, 계곡물에 빠진 아이를 건지려다 죽어간 교사와 남겨진 부인…. 마디마디 쓰리고 저린 결핍과 부재의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 깊어진 우리 사회의 상처를 묵묵히 파헤쳤다. 책을 덮고 나서 한참 동안 가슴이 쓰렸다.”(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라틴어 수업
◇한동일/흐름출판/312쪽
“인문의 정신이 거세돼 가는 이 시대를 역행하는 반란 같은 책.”(염종선 창비 이사)
“사어(死語)가 된 라틴어 문장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따뜻한 목소리로 설명해준다.”(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저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로마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가 된 가톨릭 사제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서강대에서 진행한 라틴어 수업 내용을 정리해 엮었다.
라틴어의 체계, 거기서 파생된 유럽의 다른 언어들에 대한 이야기를 뼈대 삼아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문화부터 현재의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사유의 창을 폭넓게 제시했다.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김건우/느티나무책방/296쪽
부제는 ‘학병 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정부 정책을 주도한 사람들과 그 반대편 진영에서 맞서 온 사람들이 이념적으로는 대개 한 뿌리에서 뻗어 나온 이들이었음을 관련 문헌을 통해 밝힌 책이다. 저자는 대전대 문학역사학부 교수로 ‘친일에 물들지 않았으면서 북한 정권과도 거리를 둔 우익 인사들’의 실체를 연구해 왔다.
“이 땅에 과연 ‘합리적 우파’가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그들은 누구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대한민국 우익의 재건을 바란다면 이 책이 언급한 사람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랩걸
◇호프 자런/알마/412쪽
“흥미로운 과학책인 동시에 올해 나온 어떤 책보다도 따뜻하고 순수하고 위트 넘치는 페미니즘 저작이다.”(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올해의 발견! 과학자가 자연을 탐구하는 과정을 이토록 매력적으로 그린 작가는 없었다. ‘과학 하는 여성’의 삶을 나무의 성장에 빗대 통찰력과 재치를 담아 기술한 걸작.”(정재승 KAIST 교수)
저자는 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화석 삼림을 연구해 온 미국인 지구물리학자다. 과학자를 꿈꾸던 소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닥쳤던 사회의 장벽에 대한 경험담,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얻어 어려움을 헤쳐나간 이야기를 ‘나무의 삶’에 투사해 엮어냈다.
한국 산문선 1∼9
◇이종묵 장유승 정민 이홍식 안대회 이현일 편역/민음사/전 4050쪽
삼국시대 최치원과 원효부터 조선의 정도전 정인보까지 작가 229인의 한문 산문 작품 613편을 번역했다.
특유의 색채를 문장에 담아낸 작가를 선별해 그들의 논설, 상소, 전기, 일기, 편지글, 기행문, 기록문, 묘지명 등 다종다양한 글을 방대하게 수록해 한 시대 문장의 거의 모든 갈래를 엿볼 수 있게 했다. 형식성이 지나치게 강해 가독성이 떨어지는 글은 가급적 피하면서 쉬운 우리말 표현으로 옮겼다.
“우리 한문학계의 정예들이 이뤄낸 21세기 판 동문선(東文選).”(표정훈 출판평론가)
“1300년의 시간을 지나 여전히 찬란히 빛나는 옛글을 집대성했다. 이 땅에 흐르는 사유의 깊이와 폭을 여실히 펼쳐 보여주는 자산으로 자천한다.”(박상준 민음사 대표)
힐빌리의 노래
◇J D 밴스/흐름출판/428쪽
쇠락한 미국 공업지대의 백인 저소득층 가정에서 자라난 저자가 술과 약물에 중독된 부모로부터 학대받으며 ‘살아남아 온’ 절절한 경험담을 담았다.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동력원으로 여겨지는 저소득층 백인들이 어째서 기존 미국 사회의 위선적 복지 시스템을 불신하게 됐는지 알려준다.
“진짜 가난의 풍경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한국 사회의 힐빌리와 사회제도의 역할.”(여태훈 진주문고 대표)
“어떤 어젠다든지 실효성 있는 디테일을 갖춰 시행하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보여주는 수작 논픽션. 얼핏 한국과는 별 관계없는 소재로 보일 수 있지만, 읽어 나갈수록 이 시대 모든 국가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박윤우 부키 대표)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창비/340쪽
“리베카 솔닛이니까! 남자들이 읽어야 할 페미니즘 이야기니까!”(한성봉 동아시아 대표)
8월 한국을 찾은 저자는 기자간담회에서 “단기간의 현상을 근거 삼아 페미니즘의 성패를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며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으므로 언제나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희망”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사회운동가로 활동해 온 저자는 3년 전 페미니즘 에세이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번 책에서는 데이트 폭력, 디지털 성범죄, 여성혐오 살인, 여성을 배제하는 문화콘텐츠 등 여러 주제를 짚으며 ‘여성에 대한 침묵을 강요하는 힘’에 대해 고찰했다.
●‘내 마음의 낯섦’ ‘지중해’… 공동 11위 차지한 8권의 책들
3표를 받은 공동 11위가 8권이다.
우선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9번째 소설 ‘내 마음의 낯섦’(민음사). “낯설면서 익숙하고, 재미있으면서 애잔한 이야기. 이스탄불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서사”(백선희 번역가)라는 평을 받았다.
미국 소설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은행나무)를 추천한 백창화 숲속작은책방 대표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짓밟힌 잔혹한 역사는 반복해서 기록되고 기억돼야 함을 알려준다”는 추천사를 보내왔다.
이대열 미국 예일대 신경과학과 석좌교수가 쓴 ‘지능의 탄생’(바다출판사)은 “인간지능의 세계를 먼저 알아야 인공지능도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지지를 얻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이 1949년 펴낸 역작 ‘지중해’(까치)를 첫손으로 꼽으며 “20세기의 이 위대한 고전이 이제야 나오다니!”라는 찬탄을 적었다.
미국 과학저널리스트 제임스 글릭이 인류의 소통과 정보 교환 역사를 짚어낸 ‘인포메이션’(동아시아)에 대해서는 “먹고 나서 뭘 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진수성찬”(임형남 건축가)이라는 호평이 있었다.
유정연 흐름출판 대표는 황석영 작가의 ‘수인’(문학동네)을 추천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갇혀진 자’라는 자각과 공감이 새삼스럽게 저며왔다”고 했다. ‘야밤의 공대생 만화’(뿌리와이파리)는 “요즘 젊은 과학자들 이렇게나 명랑하다”(안성열 열린책들 인문주간), ‘소비의 역사’(휴머니스트)는 “서양사학자 설혜심의 이름을 뇌리에 새겼다. 그야말로 ‘그뤠잇’!(주연선 은행나무 대표)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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