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소설이 아니라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의 자기계발서로 바꾸고 싶어요. 갈수록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말이 많잖아요? 이몽룡은 딱 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죠. 지금은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훨씬 더 잘 팔리는 시대니까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나을 것 같아요.”
“저는 춘향이가 이몽룡을 기다린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장원급제를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고시 수석 합격 아닌가요? 이미 행정고시 합격한 변 사또가 내가 좋다는데 몇 년씩 연락이 오지 않는 구 남친(옛날 남자친구)을 기다리는 건 지금 시대하고 맞지 않아요. 이몽룡이 춘향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변 사또에게 갔다가 돌아가도 받아주지 않을까요?”
2011년 11월 동아일보 공채 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이 ‘문제해결능력시험’에 써낸 답변을 추린 것이다. 이 시험에는 총 다섯 문제가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춘향전에서 바꾸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어떤 장면이고 어떻게 바꾸겠는가?”였다. 논리력, 상상력, 추리력 등을 알아보려는 문제인 만큼 정답은 없다. 여러분이라면 춘향전에서 어떤 걸 어떻게 바꾸고 싶으신가.
당시 출제 과정에서 많고 많은 소설 작품 중 하필 ‘춘향전’을 고른 건 이 작품이 동아일보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 동아일보는 1924년 오늘(12월 18일)자에 ‘춘향전 개작(改作)’ 현상공모 사고(社告)를 내보냈다. 응모 조건은 “시대, 인물 등을 일절 수의(隨意)로 개작하되 재래 춘향전의 경위를 손상치 말 것.”
당시 1등 상금은 500원. 현재 돈으로 약 325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등에는 200원, 3등(3명)에는 100원 등 총 1000원이 각각 상금으로 걸려 있었다. 당시 신문사 주최 공모전 상금은 보통 몇 십 원이 기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물론 많지 못한 현상(상금)이지만 이만한 것도 조선 신문계에서는 처음이라 자랑이 아닌 것도 아니외다”라고 썼다.
동아일보에서 신춘문예를 사고를 처음 내보낸 게 이듬해(1925년) 1월 2일자였으니까 신춘문예보다 춘향전 개작 공모가 빨랐다. 신춘문예 소설 1등 상금도 50원으로 춘향전 개작 공모보다 적었다. (참고로 2018년 신춘문예 중편소설 상금은 3000만 원이다.) 동아일보가 이렇게 춘향전에 천착했던 이유는 뭘까.
40년 넘게 춘향전을 연구한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는 2007년 펴낸 논문 ‘춘향전과 항일민족운동’에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춘향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 발간, 춘향 사당 건립, 언론 보도 등을 통해 항일민족정신을 고취했음이 확인됐다”고 썼다. 당시 지식인들이 춘향의 절개를 민족의식과 연관시키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했다는 것. 설 교수에 따르면 1912년부터 1935년까지 나온 춘향전은 총 27가지 버전에 이른다.
그러면 동아일보에서 공모한 춘향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답은 없다. 당선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5년 9월 24일 사고에서 “본사에서는 1000원의 상금(그리 많은 것은 아니나)을 걸고 춘향전의 개작을 모집하였더니 수십 편이나 되는 힘들인 원고를 얻었으나 불행히 국민 문학으로 추천할 만한 것이 없음으로 응모하신 여러분께는 심히 미안한 일이나 춘원 이광수 씨에게 청하여 춘향전을 쓰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일설(一說)춘향전’을 그해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총 96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 작품에 대해 최주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춘향전에서 능동적이고 저항적인 공동체적 유대의 전통을 재발견하고 이를 문학적으로 정전화하는 데 성공을 거둔 일설춘향전은 1920년대 제국의 민족지 구축 작업에 맞선 조선 국민문학의 실천으로서 당대의 문학사적 소임을 다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국문학자 김태준 선생(1905~49)의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논문을 1935년 1월 신년호부터 8일까지 연재하기도 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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