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거리명보다 번지가 더 편한 한국과 달리, 프랑스의 모든 주소는 거리명으로 통한다. 프랑스 파리 15구, 우리 집 거리명은 ‘펠릭스 포르(Felix Faure)’다. 대부분의 거리명은 유명한 역사적인 인물로 되어 있기에 이곳으로 이사 오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찾았던 기억이 난다. 그는 1895년 취임한 프랑스 제3공화정 시대 대통령이었다. 유대인 드레퓌스를 프로이센에 군사기밀을 넘겼다는 죄목으로 무고하게 옥에 가둔 대통령으로 유명했다. 사실 그보다 더 눈에 더 띈 건 대통령에 취임한 지 4년 만에 갑자기 엘리제궁에서 돌연사 했는데 그 사인이 복상사였다. 재임 기간 중 복상사한 대통령도 거리에 이름을 새겨 주는구나 싶었다.
파리만큼 세계에서 도시와 거리에 대해 연구한 책들이 많은 곳도 없을 듯싶다. 파리의 중심 2구 실내 파사주 안에 있던 한 고서적 판매 서점에서는 파리 1구부터 20구까지 각 구마다 한 권씩 ‘거리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1900년부터 1940년까지 거리명과 함께 당시 사진이 담긴 책을 팔고 있었다.
현재 살고 있는 파리 15구 책을 펴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진마다 적힌 거리명과 번지를 보면 우리 집, 집 앞 빵집, 그 옆 교차로까지 100년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확히 그대로 알 수 있었다.
파리 도시에 흥미를 가지던 터에 지난달 프랑스 언론들이 ‘파리 보행자들의 성경책’ 개정판이 나왔다며 일제히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1956년 사학자 자크 힐레레가 쓴 ‘파리, 옛 모습 알기’(사진). 1886년에 태어나 1, 2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참가했던 힐레레는 1941년 군대를 나온 후 뒤늦게 파리와 사랑에 빠져 옛 모습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중 5334개의 거리에 대한 연구에 빠져들었다. 1956년 파리 중심을 흐르는 센강을 기준으로 좌안(左岸), 우안, 섬과 빌리지 이렇게 3권으로 나눠져 처음 출간한 이 책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파리 거리와 관련된 책 중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책으로 수차례 개정판을 내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루이 16세, 즉 18세기까지 파리의 길은 차가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았고,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비만 오면 진흙으로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1805년에 되어서야 보행자용 인도가 나오기 시작했고, 거리에 가스로 채운 가로등이 나온 건 1829년 이후였다.
파리의 크기는 105km²로 서울의 6분의 1 수준이다. 센강 왼쪽 에펠탑부터 시테섬을 거쳐 생루이섬까지 6km 정도 강을 따라 쭉 걸으면서 남북으로 다니면 거의 모든 유명 관광지를 다 돌아볼 수 있다. 1956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의 거리만 따라다니면 될 일이다.
우리나라의 1956년 당시 거리는 흔적을 찾기 힘들 테다. 도시를 새로 계획하고 휘황찬란한 새 건물을 높이 올리는 것보다 조금은 후대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남겨두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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