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이/편안하길 바라지만/풀 수 없는 숙제가 많아/삶은 나를 더욱/설레게 하고/고마움과 놀라움에/눈 뜨게 하고/힘들어도/아름답다/살 만하다/고백하게 하네.”
수녀님은 대뜸 책을 펴들곤 시를 읊었다. 그것도 카랑할 만치 낭랑한 목소리로.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내에 있는 성 분도 은혜의 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해인 수녀(72)는 “왠지 시린 날씨 탓인지 ‘오늘의 행복’을 읽으며 여러분과 만나고 싶다”며 “언제나 오늘이란 선물에 숨어 있는 행복을 찾으며 살고 있단 말로 근황을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이해인 수녀가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샘터·사진)을 펴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암 투병에도 뜨거운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그에게도 산문집은 2011년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이후 6년 만이다. 이 수녀는 “내년 5월 23일이면 수도서원(修道誓願·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자로 살 것을 다짐하는 일) 50주년을 맞는다”며 “그간 열심히 수도자로서 삶을 살며 꾸준히 글도 써온 자신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설명했다. ―수도서원 50주년을 맞는 소회는….
“뭔가 하나의 마침표를 찍고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듯한 뿌듯함이 감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막연히 두려웠는데, 여기까지 왔음을 자축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저를 키워준 공동체와 독자에게도 고맙다. 젊은 날만 한 열정은 옅어졌지만, 시간이 준 선물인 여유로움이 찾아왔다.” ―이번 책도 그런 마음이 담긴 건가.
“맞다. ‘기다리는 행복’은 1979년 썼던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초심을 놓지 않으려고 인내했던 세월을 칭찬하고 싶었다. 시와 산문은 물론 법정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 세월호 추모시 등도 실었다. 1968년 첫 서원을 하고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일하던 시절의 일기는 처음 공개한다. 그런데 정리를 하다 보니 너무 많이 담았다. 뭔가를 비우고 가볍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 괜히 무거운 책 하나를 내놓아 죄송할 따름이다.”
―건강을 걱정하는 독자들이 많다.
“암 투병한 지 9년 됐다. ‘명랑 투병’ 한다고 말했지만 쉽지 않더라. 그래도 눈물 흘리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아, 한 번 있었다. 2008년 항암치료가 끝난 뒤였다. 피아니스트 신수정 교수가 치료받을 때 덮으라고 준 분홍 타월을 보는데 울음이 터졌다. 이 사물이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뎌줬다고 생각하니 감동스러웠다. 당시 주치의가 보낸 문자메시지는 아직도 기억한다. ‘수녀님, 이 한 몸 크게 수리해서 더 좋은 몸을 받는다고 여기세요’라고. 말이 주는 에너지가 이런 것일까. 아프고 난 뒤 행복과 기쁨이란 말을 더 많이 쓰게 됐다.”
―연말을 맞아 독자에게 전하고픈 얘기가 있다면….
“아픔이 많았던 해였다. 하지만 남 탓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자문해 보자. 요즘 북한을 보면 너무 밉지만, 그래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함께해야 한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스스로도 글 쓴다는 핑계로 주위에 도움만 받은 건 아닌지 반성한다. 내년엔 좀 더 동료와 이웃을 챙기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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