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그렇지만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 시즌에 오히려 우울하다. ‘크리스마스 환상(Christmas Fantasy)’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다. 크리스마스카드도 주고받지 않는 지금. 그 삭막함에 어릴 적 크리스마스가 더 아쉽다. 선물을 기대하며 벽에 걸어두던 양말 모양 주머니, 잠을 깨면 어김없이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장난감 선물, 그 아침이면 잠옷 바람으로 가족이 둘러앉아 삶은 계란을 먹으며 성탄을 기념하던…. 크리스마스 환상이란 게 사실은 별것 아니다. 무턱대고 기분 좋고 막연히 뭔가가 기대되는, 그래서 즐겁고 약간은 들뜬 느낌이다.
그렇다 보니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핀란드의 라플란드(Lapland)로 여행을 추억한다. 라플란드는 북극권(북위 66도 33분 44초 이북) 원주민 사미(Sami)인이 사는 영구동토지대. 스칸디나비아반도 3국(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과 러시아에 두루 걸쳐 있다. 북극권의 겨울은 어떨까. 북위 67도 43분의 레비(Levi·핀란드)를 보자. 12월의 3분의 2는 아예 해가 뜨지 않는다. 12일부터 벌써 열하루 째인데 31일까지 그렇다. 그 북쪽(북위 69∼70도)은 더하다. 12월 한 달 내내 그렇다. 레비에선 새해 첫날이 돼야 해가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북은 16일 이후이고.
내가 처음으로 레비를 찾은 건 21년 전. ‘북극권 수도’라 불리는 로바니에미(북위 66도30분)취재 후였다. 북극권 10km 남쪽의 로바니에미는 핀란드 정부가 공식 인정한 산타클로스의 고향. ‘산타클로스빌리지’와 ‘산타파크’가 여기 세워진 배경이다. 산타우체국도 있는데 핀란드 산타를 수취인으로 한 편지가 모두 거기 답지한다. 그런 산타클로스빌리지는 1년 내내 성탄절 분위기. 그래서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레비는 그 로바니에미 북쪽 170km 거리의 조용한 휴양지. 사미인들은 거기서 순록을 방목하고 허스키를 키운다. 그러면서 관광용 개썰매와 순록썰매를 끈다. 처음 찾았던 당시는 2월 중순. 그즈음엔 해가 8시간 반가량 지속됐다. 그래도 호수(모두 718개)는 모두 꽁꽁 얼어붙고 산(10개)도 역시 눈 천지. 그런 겨울에 가능한 것이라곤 눈을 헤치고 다니는 것뿐. 나는 매일 스노모빌을 탄 채 산과 호수를 누비며 라플란드의 눈 천국을 주유했다. 그리고 일정 후엔 사우나로 피로를 풀고 순록스테이크로 식사를 하며 밤이면 하늘에서 펼쳐지던 오로라 댄싱을 감상했다.
거길 2주 전 다시 찾았다. 핀에어(Finnair) 항공기가 키틸라공항에 내린 건 헬싱키공항을 출발한 지 1시간 반 후. 영하 24도의 깜깜한 계류장에선 산타클로스가 승객을 맞았다. 이어 찾은 ‘노던 라이트 랜치(Northern Light Ranch·로지)’. 정면과 천장이 통유리로 마감된 ‘스카이 뷰’ 캐빈이 나를 맞았다. 오로라를 침대에 누운 채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사우나를 위해 찾은 곳은 임멜 호반. 레이크사우나(Lake Sauna)와 스모크(Smoke)사우나, 훌리우(Hulju·야외 자쿠지)가 두루 갖춰져 있었다.
레이크사우나는 깨어 둔 얼음장으로 직행하도록 물가에 설치한 것. 스모크사우나는 통나무집 실내에 조각돌(1∼2t)을 쌓아 만든 구들장 아래 장작불을 때 데워진 돌 열기로 찜질하는 사우나다. 당시 한밤 외기는 영하 25도, 수온은 영상 2도. 그렇지만 뜨거운 열기로 몸이 덥혀지자 그 냉기와 얼음장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찬물로 뛰어들었다. 개중엔 손으로 눈을 떠 피부마찰을 하는 이도 있었다.
이튿날 아침 찾은 곳은 레비스키장. 라플란드의 산(Mountain)은 ‘펠(Fell)’이라 불린다. 정상이 두루뭉술한 펠은 여길 덮었던 두께 1.7km 빙하에 의해 빚어진 지형이다. 레비 펠의 정상(해발 531m)을 곤돌라로 오른 나는 설피하이킹을 했다. 때는 오전 10시. 일출(오전 11시 20분)은 멀었어도 동은 튼 터라 시야는 밝았다. 서녘 하늘에선 93% 보름달이 몰락 중이었고 동녘에선 붉은빛이 능선 위 하늘을 물들였다. 설원의 모든 나무는 ‘스노 몬스터(Snow monster·덮어쓴 눈이 얼어붙으며 괴물 형상을 띠는 나무)’였고.
그 풍경,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해가 뜰 무렵 풍광은 초 단위로 변한다. 지평선 아래 태양 빛의 변화무쌍한 조화 덕분이다. 스노 몬스터는 그 화면이 되어 주었다. 달이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하얀 눈 나무를 물들인 분홍빛은 점점 진해갔다. 동시에 지면의 풍광도 변했다. 대류현상(데워진 공기와 지면의 찬 공기의 자리바꿈) 덕분인데 얕은 구름이 걷히며 호수와 대지가 드러난 것. 그 모든 광경을 나는 전망레스토랑 투이쿠(스키장 안 해발 449m)에서 목도했다. 라플란드의 일출은 사진작가 문재철 씨도 동의하는 신이 내린 풍광. 그는 “툰드라 일출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말했다.
21년 만에 되찾은 레비. 변화가 없을 수 없다. 아이스카팅(눈밭 트랙의 카트 운전)에 아이스호텔과 레스토랑, 웨딩채플(모두 눈을 다져 지었다), 오로라 관측용 스카이뷰 캐빈과 반구형 유리방갈로까지…. 침대 수도 2만5000개나 된다. 그럼에도 자연은 그대로. 레비에선 여전히 이렇게 강조한다.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공기, 연중 200일의 오로라 관측이 가능한 곳임을. 2053채 사우나와 24개 이글루, 480마리 허스키와 1만2000마리 순록 그리고 75cm 두께 눈도.
그렇다. 레비야말로 크리스마스 판타지의 성지다. 정말로 산타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여기여야 할 것 같은. 그래서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여길 찾는다. 분장 산타라도 그가 끄는 순록썰매를 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환상이 현실로 될 듯싶어서. 그러니 누구라도 크리스마스 판타지를 원한다면 레비로 갈 일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레비(핀란드)에서 조성하 여행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찾아가기: ‘인천∼헬싱키’는 핀에어(Finnair·핀란드 국적 항공사)가 직항 운행 중. 헬싱키공항은 한국에서 최단거리 유럽 허브. 또 입출국 자동심사대(전자여권 소지자) 덕분에 입출국 및 환승이 편리하고 신속하다. 비행시간은 갈 때 9시간, 올 때 8시간. 항공 동맹은 ‘원 월드(One World)’에 소속. www.finnair.com/kr/
레비: 8월 말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 겨우내 영하권을 유지하는 툰드라(지하 4m 이하는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땅) 지대. 라플란드의 대표적인 사계절 휴양 타운으로 연간 방문객은 70만. www.levi.fi/en◇즐길 거리 ▽레비스키장: 핀란드 최대 규모. 시즌은 10월∼이듬해 5월 중순. 고도차 325m에 리프트 17개(곤돌라 2개 포함). ▽설피 하이킹: 레비스키장 슬로프. 알파인 노르딕 스키와 설원 하이킹도 안내. www.lapinluontoelamys.fi ▽아이스카팅: 15분 동안 설상에서 드리프팅을 즐기는 서키트 질주가 매력. www.icekarting.fi ▽개·순록썰매 타기: 얼어붙은 호수설상을 개썰매 2km, 순록썰매 1km 질주. 실내에서 순록소시지와 커피 등도 제공. 1시간 30분∼2시간 소요. www.polarspeed.fi ▽전통사우나 △임멜카르타노: 임멜 호반의 레이크·스모크 사우나 시설. www.immelkartano.fi/en/Finnish_Sauna◇크리스마스 판타지 체험 ▽엘브스 하이드어웨이: 산타도우미 엘프(여성)가 숨어사는 숲속 마을(테마파크)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크리스마스 체험(연중 내내). www.lapintonttula.fi/en ▽라플란드 결혼식: 눈으로 짓거나 전통 티피(텐트) 웨딩채플에서 결혼식. www.sunandsnowwedding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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