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은 때로 불쑥 튀어나와 하염없이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그 기억 속에는 지금 자신 안에 담긴 것들의 원형이 존재한다. ‘해변빌라’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이 장편소설에서 저자는 존재를 지탱시키는 기억과 관계에 대한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야기는 ‘나애’가 보낸 1970년대 유년기와 2010년대의 현재가 교차된다. 동생들이 연이어 태어나는 바람에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나애는 친구 도이, 상과 유년의 시간을 채워나간다. 함께 사는 종려할매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한다. 2010년대의 나애에게는 10년 동안 만났던 강, 3년간 동거한 희도가 있다.
나애는 연인과 가족으로 묶이는 것을 피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손에 쥐었을 때가 아니라 기억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자기의 것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안에는 그런 장소가 있다. 한번 일어난 일은 영원히 복기되는 곳,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애에게 소유는 이런 의미다.
화자는 나애지만 중간 중간 나애의 오랜 친구 연태의 시선에서도 이야기를 풀어간다. 매력적이지만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나애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 삶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나애는 자신을 밀어냈던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가 마음을 온전히 열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고백한다. 이제는 늙어 바스라질 것 같은 어머니에게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나애의 절규는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마음이 다 찢어지면, 그 다음엔 자기 마음의 바깥에서 살게 돼요. 자기 마음의 바깥이 어딘지 알아요? 거긴 세상의 밖이에요. 나 혼자뿐인 것 같은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등불을 안고 걸어가는 거예요.’
어린 시절 늘 의아했던 어머니의 행동과 마음, 지인들이 처한 상황과 진실을 모두 알게 된 나애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떠나보냈던 희도에게 향한다.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순간순간의 감정을 곱씹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서서히 스며들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유년의 기억 역시 돌아보게 만든다. 기억과 마음을 찬찬히 음미하게 하는 한 잔의 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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