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뜨거운 사랑의 시편…신경림 시 ‘세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6일 16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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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
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고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안 한 해를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뒤돌아본다

저물녘
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놓는
이 폭풍 이 바람은 무엇인가

눈도 귀도 멀게 하는
해도 달도 멎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

자리에 누워 뒤돌아본다
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
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
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한 해를

꿈속에서 다시 뒤돌아본다
삶의 뜻으로
또 새로 본 이 한 해를

-신경림 시 ‘세밑’

‘세밑’이라는 제목 때문에 한 해를 돌아보며 정리하는 일기 같은 시편이리라 짐작했던 독자들에겐 따뜻한 반전이리라. 산업개발로 황폐화된 농촌의 울분을 담은 ‘농무’의 시인으로만 신경림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세밑’의 첫 연은 얼핏 일기 같은 시편처럼 느껴진다. 세밑을 맞아 시인이 돌이켜본 한 해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알게 된’ 시간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과 기쁨을 ‘비로소’ 알게 된 계기가 있다. 송두리째 자신을 흔들어놓고 눈과 귀를 멎게 만든 폭풍 때문이다. 당연히, 폭풍 같은 사랑이다. 사실 사랑이 깨우치는 것이 어디 저녁노을과 새소리의 아름다움뿐일까.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세상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났음을 기억한다. 그래서 ‘세밑’은 뜨거운 사랑의 시편이다.

시인은 세 번째 연에서 ‘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 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 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시간이라고 노래하며 자신을 몰아친 사랑의 감정을 담담하게 정리한다. 그는 ‘헤어지는 일의 아픔’이라는 짧은 한 행으로만 적었지만 시인이 겪었을 이별의 상처는 아프고도 길게 전달된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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