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소설과 현실의 경계, 그 가깝고도 먼 어딘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30일 03시 00분


◇저물 듯 저물지 않는/에쿠니 가오리 지음·김난주 옮김/352쪽·1만3800원·소담출판사

책은 팍팍한 삶을 버텨낼 힘을 준다. 동아일보DB
책은 팍팍한 삶을 버텨낼 힘을 준다. 동아일보DB
원하는 곳으로 단숨에 떠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책을 읽는 것. 한데 책 속에 완전히 빠져 사는 삶은 어떨까. 탐독가라면 벌써부터 군침을 꼴깍 삼킬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그런 인생을 실감 나고 천연덕스럽게 그렸다. 미노루는 부모가 남긴 막대한 유산 덕분에 책에 파묻혀 산다. 재산 관리는 세무사 친구에게 맡겼다. 미노루에게 삶의 중심은 책이다.

시작부터 미노루가 읽고 있는 북유럽 미스터리가 등장한다. 가족과 친구, 지인들은 불쑥불쑥 들이닥쳐 책 읽기를 멈추게 만들 뿐이다. 책 속 배경인 하얀 눈이 가득한 겨울을 사는 미노루는 현실의 계절인 여름을 문득문득 덥다고 느낄 정도다. 미노루에게는 딸이 있지만 아이의 엄마인 나기사는 책만 읽는 그에게 질려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

이야기는 현실과 소설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책의 내용이 한참 펼쳐지다가 인터폰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며 지인과 누나가 찾아오는 식이다.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소설 속 세계와 평범한 현실이 또렷이 대비된다. 미노루와 함께 책을 읽다가 중간 중간 일상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공유하는 기분이다. 이혼했다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찾아온 친구에게 미노루는 이렇게 말한다.

“아, 그런데 잠깐 기다려야겠다. 지금 좀 긴박한 장면이라서, 이 장이 끝나는 데까지 읽지 않으면 궁금해서 안 될 것 같아.”

정말 강적이다. 작가는 ‘이렇게 살아보는 거 어때?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니?’라며 장난스럽게 물어보는 것 같다. 유쾌하고 신선한 구성의 이야기도 매력적이다.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견뎌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현실을 까맣게 잊은 채 정신없이 읽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꼽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강렬한 경험을 선사할 책들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저물 듯 저물지 않는#에쿠니 가오리#김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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