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초짜 시절의 일입니다. 뮤지컬이었는지 연극이었는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작품에 대한 리뷰기사를 1500자 정도 써 두었는데 갑자기 부장이 “오늘 지면이 빡빡하다”며 거의 절반 수준인 800자로 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800자면 머리 빼고 꼬리 빼면 남는 게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부장의 한 마디에 그만 꼬리를 팍 내리고 말았습니다.
“3시간짜리 인터뷰를 10분으로 줄일 수 있는 게 기자의 능력이야. 800자면 정치 평론도 쓸 수 있어.”
뮤지컬 모래시계를 보며 옛 생각이 났습니다.모래시계는 1995년 ‘귀가시계’라는 찬사를 들으며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한 ‘국민 드라마’였죠. 이 방대한 내용을 2시간 30분 남짓한 분량으로 압축하는 것은 1500자의 기사를 800자로 줄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난한 작업일 겁니다. 물론 스포츠뉴스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은 논외입니다.
뮤지컬 모래시계의 각색과 가사, 연출을 맡은 극작가 조광화 연출의 솜씨입니다. 깊이 있는, 하지만 절대 무겁지만은 않은 대사(또는 가사)와 감각적인 무대 스타일이 돋보이는 연출가(본인은 작가로 불리는 것을 선호합니다만)이죠. 모래시계의 곳곳에서는 드라마와 사뭇 다른 조광화 류(流)가 묻어납니다.
첫 장면부터 모래시계는 관객의 숨을 멎게 만듭니다. 검사가 된 우석이 죄수 태수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재판정의 장면이죠. 우석은 태수에게, 마치 자신에게 던지듯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태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디선가, 어쩌면 태수가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휘파람 소리가 들립니다. 모래시계의 테마곡이라 할 백학의 멜로디입니다. 마치 “그건 바람에게 물어봐” 하는 것만 같습니다. 첫 장면에서부터 소름이 돋습니다.
극 중 등장하는 세 번의 우산 장면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우산은 극 중 ‘죽음’의 상징처럼 등장합니다. 태수의 어머니와 혜린의 아버지, 그리고 태수가 세상과 작별할 때 우산은 효과적인 단절의 이미지를 드러냅니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친구 이상, 사랑 이하’, 사랑고백의 극을 보여주는 ‘너에게 건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만 봐야 하는 슬픈 사랑인 ‘그만큼의 거리’ 등 넘버들 하나 하나가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초연임을 감안하더라도 별 다섯개 만점에 다섯개 반을 주고 싶은 작품이로군요. 왜냐고요? 우우우우~ 우우우우~ 그건, 바람에게 물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