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게리 올드먼의 체형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어요. 정말 애를 먹었지만 그의 수상에 고생스러운 기억이 한방에 날아갔죠!”
17일 국내에 개봉하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 주연 올드먼은 처칠 총리를 완벽하게 연기하며 올해 미국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 감쪽같은 분장 뒤엔 한국인 특수의상 제작자인 바네사 리(49)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리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자다. 2006년 영화 ‘언더월드2’의 늑대인간 특수의상 제작을 계기로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이 100편이 넘는다. ‘아이언맨’ 시리즈의 빨간 만능 슈트나 ‘어벤져스’ 시리즈에 나오는 슈퍼히어로 의상들도 그의 솜씨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14일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최근작 ‘다키스트 아워’는 실존인물인 처칠 총리를 스크린에서 100% 되살려야 해서 자료 조사에만 이전 프로젝트보다 4∼5배 이상 시간과 공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올드먼이 제가 만든 ‘팻 슈트(fat suit)’를 입어보더니 ‘이건 예술 작품이야’라고 칭찬해 주더군요. 하지만 처칠의 표정이나 걸음걸이까지 똑같이 재현한 그야말로 예술가 그 자체였습니다. 배우가 최고의 연기를 펼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돕는 게 제 일이죠. 영화에 보탬이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던 리는 현재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그가 20대 중반에 미국으로 건너간 이유도 한국에선 장애인에 대한 편견 탓에 취직이 쉽지 않아서였다. 현지에서도 고생이 적진 않았지만, 이젠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 등 만화나 상상에서 가능했던 옷을 현실로 꺼내놓는 ‘마법사’로 자리 잡았다.
“대략적인 디자인은 제작사나 연출진이 정해주지만, 그걸 실물로 구현하는 건 오롯이 제 역할입니다. 아무래도 좀 ‘덕후’ 같은 면이 있어야 슈퍼히어로 팬들 입맛도 맞출 수 있어요. 장애를 극복한 비결은 스스로 신경 쓰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으면 그런 것쯤 별문제가 되지 않더라고요.”
리는 올해 개봉 예정인 김지운 감독의 신작 ‘인랑’의 의상 작업에도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에 뛰어드는 건 이번이 첫 작품이다.
“제안을 받자마자 흔쾌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골수팬이거든요. 개인적으로 강동원이란 배우는 정말 의상 제작자를 보람 있게 만들더군요. 너무 훌륭한 ‘옷빨’을 지녔어요, 하하.”
이미 많은 것을 성취한 리에게 할리우드에서 이루고픈 최종 목표는 뭘까. 그는 3월에 열리는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언급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가 분장상 후보에 올라가 있습니다. 우리 팀 모두가 기대를 걸고 있어요.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였을 때, ‘오스카’는 하나의 정점처럼 여겨졌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어떤 상보다는, 제가 만든 의상이 연기자의 연기를 뒷받침할 좋은 도구가 되고 있다면 이미 목표는 이룬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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