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 죽음 마케팅 ‘사의찬미’ 대성공 두려웠던 日이 발표한 노래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8일 15시 27분


1926년 윤심덕 사후 2주만에 나온 ‘사의 찬미’  음반 광고(왼쪽). 김문성 씨 제공
1926년 윤심덕 사후 2주만에 나온 ‘사의 찬미’ 음반 광고(왼쪽). 김문성 씨 제공

지난해 말 유명 가수의 자살로 한국사회가 한바탕 술렁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노랫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에도 유명인의 죽음은 대중의 커다란 관심사였습니다. 19세에 요절한 조선권번 댄스 가수 최향화나 ‘강명화가’라는 노래로까지 만들어진 명기 강명화의 죽음이 대표적입니다.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 김우진의 소위 ‘정사’(情死) 사건은 유명인의 죽음이 마케팅에 활용된 최초의 사례입니다. 니토(日東) 레코드사는 윤심덕 사후 2주만에 ‘사의 찬미’를 발매하면서 ‘사의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라고 광고합니다. 니토의 ‘고인(故人) 마케팅’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사의찬미’가 지닌 우울한 정서와 상실감 가득찬 노랫말은 3·1운동 실패 후 만연해있던 젊은이들의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를 더욱 자극합니다. ‘사의찬미’는 대박이 났지만, 오히려 일제는 두려웠을 겁니다. 이러한 정서가 일순간 원망으로 바뀌고 일제에 대한 분노로 방향을 튼다면 걷잡을 수 없는 노도(怒濤)가 될 테니까요.

지식인들이 언론을 통해 유행가요가 퇴폐주의를 조장한다고 맹비난합니다. 허무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을 훈계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업고 태어난 노래가 1934년 니토의 ‘애상부(哀傷賦)’였습니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소프라노 박경희(朴景嬉)입니다. 그녀는 졸업하던 해 전일본신인음악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상해 주목을 받습니다. 이를 눈여겨 본 닛또는 윤심덕과 같은 평양 출신인데다 외모까지 뛰어난 박경희를 발탁합니다.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1934년 ‘애상부’를 발표한 소프라노 박경희. 김문성 씨 제공
1934년 ‘애상부’를 발표한 소프라노 박경희. 김문성 씨 제공

사의찬미와 애상부 사이에는 극명한 정서의 대비가 있습니다.

윤심덕의 사의찬미는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이라는 노랫말로 방랑하고 좌절하는 조선 젊은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경희의 애상부는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헛 걱정 말으소”라는 노랫말로 이들 청춘을 훈계하고 있습니다. 꾸짖음. 이것이 애상부가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박경희 ‘애상부’ 음반. 김문성 씨 제공
박경희 ‘애상부’ 음반. 김문성 씨 제공

교묘하게 윤심덕을 덧입혀 이익을 취하고자 했던 음반사와 조선 젊은이들의 정서를 못마땅하게 여겨 훈계하고 싶었던 일제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애상부’. 하지만 윤심덕의 데자뷰만 보았을 뿐, 애상부나 박경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김문성 국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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