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유명 가수의 자살로 한국 사회가 한바탕 술렁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노랫말은 가위 충격적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에도 유명인의 죽음은 대중의 커다란 관심사였습니다. 19세에 요절한 조선권번 댄스 가수 최향화나 ‘강명화가’라는 노래로까지 만들어진 명기 강명화의 죽음이 대표적입니다.
1926년 현해탄이라 불리던 대한해협에 몸을 던진 윤심덕, 김우진의 소위 ‘정사(情死)’ 사건은 유명인의 죽음이 마케팅에 활용된 최초의 사례입니다. 닛토(日東) 레코드사는 윤심덕 사후 2주 만에 ‘사의 찬미’를 발매하면서 “사의 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창해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라고 광고합니다. 닛토의 ‘고인(故人) 마케팅’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사의 찬미’가 지닌 우울한 정서와 상실감 가득 찬 노랫말은 3·1운동 실패 후 만연해 있던 젊은이들의 허무주의를 더욱 자극합니다. ‘사의 찬미’는 대박이 났지만, 오히려 일제는 두려웠을 겁니다. 이러한 정서가 일순간 원망으로 바뀌고 일제에 대한 분노로 방향을 튼다면 걷잡을 수 없는 노도(怒濤)가 될 테니까요.
‘사의 찬미’에서 비롯된 염세적 정서는 1931년 명곡 방랑가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지식인들이 언론을 통해 유행가요가 퇴폐주의를 조장한다고 맹비난합니다. 허무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을 훈계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업고 ‘사의 찬미’로 재미를 봤던 닛토가 윤심덕 마케팅을 시도하며 1934년에 제작한 음반이 ‘애상부(哀傷賦)’였습니다.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곡이지만, 실은 ‘사의 찬미’의 리메이크 곡이죠.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일본 도쿄(東京)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소프라노 박경희(朴景嬉)입니다. 윤심덕과 같은 평양 출신으로 전일본신인음악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상해 주목을 받습니다. 이를 눈여겨본 닛토가 박경희를 발탁합니다.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사의 찬미’와 ‘애상부’ 사이에는 극명한 정서의 대비가 있습니다.
사의 찬미는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이라는 노랫말로 방랑하고 좌절하는 조선 젊은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상부’는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헛걱정 말으소”라는 노랫말로 이들 청춘을 훈계하고 있습니다. 꾸짖음. 이것이 ‘애상부’가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교묘하게 윤심덕을 덧입혀 이익을 취하고자 했던 음반사와 조선 젊은이들의 정서를 못마땅하게 여겨 훈계하고 싶었던 일제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탄생한 ‘애상부’. 하지만 윤심덕의 데자뷔만 보았을 뿐, ‘애상부’나 ‘박경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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