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제국대학’은 1924년 첫 신입생을 선발해놓았지만 예정보다 한 달이 지나서야 개학했다. 일본 법제국의 심의 과정에서 그 이름이 ‘조선 제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고 ‘경성제국대학’으로 이름을 바꿔서야 각의를 통과할 수 있었다.
경성제국대학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대학의 역사를 들여다본 책이다. 대학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저자는 ‘권력’을 추출했다. 저자는 식민권력이 대학 설립에 관여했던 식민지 시대를 지나 광복 후에는 미군정이라는 타자적 권력이 개입됐다고 파악한다. 미군정이 고등교육기관을 대학으로 일원화하고 일본식 대학을 해체하는 개조와 개편 과정에서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국공립뿐 아니라 사립대까지 국가 재정이 투입되는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는 “정부에 의해 타율적으로 추진되던 대학 근대화 과정에서 대학은 산업인력개발 양성소로서 정체성을 갖춰갔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배출하고자 이공계와 상경계 학과에 주목된 대학 운영에 대해, ‘국가권력’이 대학을 주도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한다.
1987년 민주화 바람 이후 강도 높은 대학 개혁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시장권력이 대학을 경영하면서 “대학은 경제적 가치 창출의 전진기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대학이 능동적으로 시대와 조응하는 아카데미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타율적인 개혁을 반복해왔다는 것. “대학의 자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대학이 나서서 기꺼이 국가에 종속되고 시장 원리에 스스로 내맡기는 오늘날 자화상은 대학이 걸어온 역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대학의 역사가 ‘권력’이라는 키워드 외에도 경제 문제, 인구 문제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된 게 아니냐는 이견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대학의 역사를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 신화로만 기억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분석에는 공감할 만하다. 한국의 대학사를 정리하는 시도가 처음이라는 점, 대학의 역사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저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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