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다습한 대기에 적설량 풍부, 다양한 눈이 빚은 고아한 풍경 매력
눈 녹은 샘물로 빚은 사케명가 즐비
북극권 동토라면 눈은 ‘사건(事件)’이 아니라 ‘일상(日常)’이다. 눈 극복 지혜가 번득이는 건 그 덕분. 핵심은 대처를 염두에 둔 상세한 분류다. 우리는 어떤가. 그저 몇 가지에 그친다. 함박눈 싸라기눈 진눈깨비 폭설 정도. 북극권은 어떨까. 쉰 가지나 된다. 천둥 눈(thunder snow), 강풍 동반 눈 폭풍(blizzard)과 폭설(snow strorm), 호수효과 눈(따뜻한 호수를 지난 냉기로 야기된 눈), 다이아몬드먼지(diamond dust·막 뜬 태양으로 야기된 대류 현상으로 공중 부양된 눈 결정이 햇빛을 반사시켜 반짝거리는 현상)….
혼슈 북방 아키타(秋田)현은 일본서도 이름난 눈 고장. 눈 내리는 날이 100일을 넘긴다. 그래서 눈도 열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그런 만큼 이곳 설경은 우리와 딴판이다. 그 풍성하고 다양한 눈이 빚어낸 고아한 겨울 풍정을 우린 이미 본 적 있다. 인기 드라마 ‘아이리스’를 통해서인데 설경의 무대가 아키타였다.
동해변의 아키타는 북위 39도선.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靑森)현 바로 밑이다. 그 풍성한 눈은 동해의 선물이다. 따뜻한 바다의 다습한 대기가 바람에 밀려 여기 와선 데와(出羽), 오우(奧羽) 두 산맥을 따라 급상승. 그게 눈이 되어 떨어지는데 며칠씩 하염없이 부슬부슬 내린다.
눈은 곧 물. 녹아서는 내가 되고 강이 되고 지하로 스며든 건 샘이 되어 솟는다. 아키타 명품 아키타코마치(쌀)와 사케(청주)의 몸체(body)인 부드러운 샘물이 그것이다. 오우 산맥 아래(해발 45m) 구릉지대의 여섯 동네가 사케 벨트가 된 건 그 물이 게서 솟은 덕분.
아키타는 사케 양조장 수(42개)도 상위지만 1인당 사케 음주량도 전국 2위. 한마디로 주당의 고장이다. 겨우내 눈에 갇히다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 1위 니가타(新潟)현(소설 ‘설국’의 고장)이 그걸 뒷받침한다. 사케는 겨울에 빚는다. 눈과 추위가 잡균을 차단해서다. 할 일 마땅찮은 겨울에 술이 빚어지니 즐기기에 겨울만 한 계절이 있을까.
그런데 온천까지 많으니 그 둘의 궁합은 찰떡. 게다가 이와테(巖手)현 경계의 센보쿠(仙北)시는 도와다하치만타이 국립공원의 산악. 너도밤나무 원시림에 거대한 분화구(칼데라) 호수 다자와코(田澤湖)까지 있다. 그런 곳이 눈에 덮이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산중설경이 펼쳐진다. 이 겨울 아키타로의 여행은 그런 곳을 주유한다.
가지마다 흰 눈을 인 나무의 숲 한가운데 개울에 있는 가니바(蟹場) 온천의 로텐부로(露天風呂·노천 온천탕), 거기 몸을 담근 채 설경을 감상하노라니 이런 호사가 있는가 싶다. 하지만 그런 눈에 진정으로 가슴이 설렐 이는 따로 있다. 스키어다. 그중에도 딥스노(Deep snow·압설 차량으로 정설하지 않은 눈밭)와 백컨트리(Back country·스키 허가 지역 너머의 산중)에 굶주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그들에게 아키타는 천국이라 장담한다. 전 세계 150개 스키장을 답사한 경험에 의거한 판단이니 믿어도 좋다.
스키는 두 가지다. 눈을 지치는 스키, 스키를 벗은 뒤 즐기는 ‘애프터 스키(After ski)’. 일본 스키 여행의 묘미는 이 둘의 환상적 조화다. 스키 후에 따끈한 온천욕, 푸짐한 가이세키 요리를 감칠맛 만점의 사케로 반주(飯酒)하는…. 허다한 일본 스키 여행지 중 최고는 아키타다. 눈과 온천, 사케가 빚어내는 초자연의 겨울 풍정이 그 배경이다. 2월 하순엔 직항전세기(인천∼아키타)도 뜨니 절호의 기회다.
[온천]
일본 료칸의 기원은 ‘혼진(本陣)’이다. 1600년대 에도시대에 지방 영주가 에도(도쿄)로 쇼군을 배알하러 갈 때 호위무사와 함께 묵던 숙소다. 잘 차린 가이세키 요리에 극진한 서비스는 거기서 탄생했다.
취재길에 찾은 다자와코 고원의 쓰루노유(鶴の湯) 온천. 1691년 개업한 혼진으로 327년 역사의 고풍이 빛나는 온천 료칸이다. 혼진 세 채도 여전하고 신(新)혼진 등 40실은 추가됐다. 유황 냄새 진동하는 온천엔 탕도 여럿. 실내 1인용부터 남녀혼욕의 로텐부로까지. 그런데 남성 전용은 없다. 저녁식사는 전통에 따라 객실로 날라준다.
쓰루노유는 과거와 전통을 소중히 지켜왔다. 국도로부터 1km 산중의 료칸까지 진입로 포장을 거부한 것, 전선을 땅에 묻어 가린 것, 고색창연한 목조 건물을 어렵사리 유지하는 것 등등. 그래서 여기 숙박은 400년 시간여행 격이다. 혁신도 보인다. 오카미(女將·여주인)의 통상적인 손님 영접을 없앤 것이다. 1분이라도 더 온천욕을 즐기라는 배려다.
쓰루노유는 이렇듯 비밀스레 숨다시피 했다. 이런 온천을 일본인은 ‘히토유(秘湯)’라 부른다. 히토유는 전국에 146개, 아키타에 12개. 그런데 그중 7개가 이 뉴토온천향(乳頭溫泉鄕)에 있다. 그중 또 한 곳에 들렀다. 그게 가니바 온천이다. 산골짝 깊숙한 물가의 로텐부로 풍광은 지금껏 일본에서 만난 것 중 최고. 그리고 그 설경은 잊지 못할 정도다. 이곳 역시 혼탕. 온천수는 탁해서 수중의 신체가 드러나지 않는 쓰루노유와 달리 투명하다. 료칸 건물에서 이 개울까지는 50m의 설벽 눈길로 이어지는데 그걸 걷는 게 또한 매력이다.
[스키]
일본에선 스키장마다 적설량 경쟁이 치열하다. 그래서 매일 재서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다다익선이므로. 그런데 다자와코 스키장만은 초연하다. 체크해 봐도 별 변화가 없다. 매일 내리는 만큼 늘어야 하는데도. 그래서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무의미하단다. 그럴 만도 하다. 눈 부족을 우려하지 않아서다. 여기선 더 내리는 게 문제다. 이것만으로도 이 스키장의 설질과 환경이 가늠된다. 규모도 용평리조트의 두 배나 되는데 풍치마저 기막히다. 호수(다자와코)를 보며 다운힐 한다.
이달 2일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날 이곳은 가족 스키어의 천국이었다. 너비 300m 이상의 광대 설원에선 충돌 우려 없이 자유로이 활강하고 또 배운다. 초급 슬로프가 이렇듯 길고 넓은 곳, 여태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유치원생의 단체 스키 수업과 레슨이 여기 집중된 건 그 덕분이다. 다음 날은 잿빛 하늘에서 눈이 내려 딥스노 파우더(powder) 스키잉을 즐겼다. 물론 정설 슬로프 밖에 따로 둔 최상급용 비(非)정설 슬로프에서다.
아키타는 백컨트리 스키의 명소다. 이건 스키로 산을 오른 뒤 파우더 스키잉으로 내려오는 ‘등산+스키’인데 무대는 고마가타케의 다자와코, 모리요시산의 아니(阿仁)스키장. 등산할 때 뒤로 미끄러짐을 막는 실(seal), 뒤축이 들리는 전용 바인딩과 가벼운 산악스키용 플레이트, 비컨(beacon·눈사태 대비 설중 탐지기)과 전문 가이드는 필수.
[온센메구리]
쓰루노유 등 뉴토온천향 7개 산중 료칸을 순회버스로 돌며 각기 다른 풍광의 로텐부로에서 온천욕 즐기기. 온센메구리(溫泉巡り) 수첩(1800엔)으로 온종일 이용.
[내륙종관철도]
이 열차 여행이야말로 아키타의 평원 설경을 감상하기에 제격. 열차는 단칸 혹은 두 칸 편성으로 다카노스(기타아키타시)∼가쿠노다테(센보쿠시) 94.2km의 아키타나이리쿠센(秋田內陸線·역 29개, 터널 20개, 교량 322개)으로 운행한다. 가쿠노다테(角館)는 17세기 사무라이 집단거주지가 여태껏 잘 보존돼 ‘작은 교토’라 불린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