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투기자본과 내부 스파이… 유엔 평화를 위협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4일 03시 00분


◇유엔을 말하다/장 지글러 지음·이현웅 옮김/372쪽·1만6800원/갈라파고스

대규모 살상 자행되는 수단 사태, 중국 거부권 행사로 유엔 개입 불가
유엔에 깊숙이 관여하는 미국, 막강한 힘 이용해 좌지우지
이해 관계에 얽매여 힘 잃었지만 폭력적 이기주의 막을 유일한 존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 장면. ‘유엔을 말하다’의 저자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국 지위는 모든 국가가 교대로 맡아야 한다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개혁안을 지지하며, 최근 이 개혁안이 관심을 받는 데서 희망을 가진다. 동아일보DB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 장면. ‘유엔을 말하다’의 저자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국 지위는 모든 국가가 교대로 맡아야 한다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개혁안을 지지하며, 최근 이 개혁안이 관심을 받는 데서 희망을 가진다. 동아일보DB
수단의 다르푸르에서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아프리카 민족 수십만 명이 이슬람교 독재자 오마르 알 바시르 장군에게 고통을 겪고 있다. 신체가 절단되고, 불에 타 죽고, 독약을 탄 우물물 때문에 생명을 잃는다. 이런 끔찍한 살상에도 유엔은 수단 사태에 개입하지 못한다. 중국이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수단이 가진 석유자원의 주요 고객이 중국이라는 배경이 있다.

시리아 내전에 유엔이 개입하지 못하는 것도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러시아의 거부권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폭격을 가할 때도, 이스라엘과 가까운 미국의 거부권 때문에 유엔은 어떤 정책도 펼 수 없다. ‘유엔을 말하다’의 저자가 밝히는 유엔의 정치논리다.

이 책은 유엔식량특별조사관,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일한 저자가 펼쳐 보이는 유엔의 민낯이다.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기구라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막후 이야기는 정글 같은 암투극이다. 당연히 유엔이 개입해야 할 사태에도 국가의 이해가 엮여 있기에 유엔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은 ‘반인도적 범죄와 관련된 모든 갈등 상황에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등 개혁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안보리 상임5개국의 거부에 부딪혀 좌절됐다.

저자는 벌처펀드(투기적인 투자자본)와의 투쟁 과정을 보여주면서 유엔의 속살을 드러낸다. 채권을 싼 가격에 사들였다가 비싼 가격으로 되파는 벌처펀드로 인해 파산 상황에 처한 아르헨티나의 위기에 대처하고자 저자는 새로운 국제법 규정을 촉구하는 분석서를 만든다. 그러자 벌처펀드는 아르헨티나 선거에 돈을 써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대통령이 당선되도록 한다. 벌처펀드가 저자의 분석서 내용을 파악한 것은 ‘유엔 안의 스파이들’에 의해서다. “세계의 모든 첩보기관이 (…) 대화를 엿듣고, 몰래 서류를 복사하고, 유엔의 국제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신임을 얻은 유엔 파견 외교단인 양 자주 행동한다.”

저자는 유엔이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주요 원인으로 미국이라는 힘의 논리를 꼽는다. 유엔 예산의 반 이상을 미국이 지원하는 상황이며, 유엔의 고위직은 대부분 미국 출신 혹은 미국에 우호적인 이들이 맡고 있고, 미국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임기 연장이 거부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같은, 연임하지 못한 사무총장이 대표적이다. 저자가 유럽인이라는 점이 감안되고 다소 감정적으로 쓴 부분도 눈에 띄지만, 미국이 유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현실이다. 반기문이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데 대해서도 일본을 의식한 중국의 지지 및 미국과 한국의 관계 등 정치 논리가 작용했다고 서술한다.

유엔이 이렇듯 내적인 복마전으로 무기력할지라도 저자는 폭력적인 이기주의를 중지할 유일한 방법은 유엔을 통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좌절됐던 코피 아난의 개혁안에 이제는 많은 국가가 관심을 갖는다면서, 저자는 유엔의 미래에 희망을 건다. 저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인용해 이 희망을 이렇게 표현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당신들을 무시한다. 이어 그들이 당신들을 비웃는다. 이어서 그들은 당신들과 싸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당신들은 승리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유엔을 말하다#장 지글러#이현웅#시리아 내전#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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