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겨울패럴림픽이 연일 큰 감동을 만들며, 막바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개회식엔 장애인 가수 강원래(클론) 씨가 휠체어를 타고 멋진 공연을 선사했습니다. 46세 주부 이도연 씨는 힘든 설상 경기를 완주하며 국민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장애란 그저 조금 불편한 것이란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선수들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깊이를 느낍니다.
박록주(1905∼1979)라는 명창이 있습니다. 그녀는 판소리사에서 가장 뛰어난 여류 명창으로 평가받습니다. 시각장애를 극복한 인간문화재였으며, 소설가 김유정으로부터 지고한 스토킹(?)을 당한 소리꾼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무려 3년간 구애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김 작가의 집요함은 로맨스와는 어울리지 않은, 상상을 초월하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박 명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박 명창은 노름꾼 아버지 손에 끌려 열네 살 때 200원에 권번 우두머리(행수) 기생에게 넘겨집니다. 이른 나이에 좌절감과 배신감부터 배웠습니다. 그가 마약 복용으로 6개월 형을 받은 것도, 자살을 시도한 것도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돈 없는 문학도 김유정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 박 명창을 버티게 한 것은 소리였습니다. 그는 판소리에 인생을 걸었고, 당대 최고라는 5명창을 모두 사사했습니다. 소리 내공 덕에 많은 명반을 남겼습니다. 스승 박기홍에게서 배운 ‘대관강산’은 초기 녹음 가운데 명반으로 꼽힙니다. 판소리 춘향가 주요 대목 녹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배 김초향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해 판소리 중흥에 앞장섭니다. 하지만 1952년 눈병을 앓다가 결국 시력을 잃습니다.
박 명창이 받은 충격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던 것 같습니다. 1950년대 중후반까지 활동 이력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1960년에는 폐렴까지 걸리는 이중고를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장애를 당당히 극복합니다. 훗날 트레이드마크가 된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기 시작한 게 이 시기입니다. 공연보다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1964년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됩니다. 1967년 발매한 ‘흥보가’ 음반이 박 명창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히는 것도 삶의 고비를 잘 넘긴 데서 오는 여유로움이 소리에 반영됐기 때문입니다. 1979년 타계하기까지 박귀희 김소희 박초선 박송희 한농선 이옥천 정유진 등 많은 명창을 양성하며 제2의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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