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 모의가 한창일 무렵, 중국 만주에도 동제사의 밀명이 전달됐다. 각자 영웅으로 할거하던 만주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에 절망하던 조소앙은 지린(吉林)에서 잠적 수도하고 있었는데….》
1919년 1월 24일(음력 1918년 12월 23일), 상하이의 비밀결사조직 동제사(同濟社)의 수장 신규식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요원 정원택(1890∼1971)은 펑톈(奉天)을 떠나 지린(吉林)으로 잠입했다. 일본을 담당한 동제사 요원이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한창 2·8독립선언을 모의하느라 분주할 때였다. 정원택 역시 만주 지역 지린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그래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 등 한국 대표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동제사의 교육기관 박달학원 출신인 정원택은 지린성내 한 중국 객잔(客棧·중국의 숙박시설)에서 선배 동지 박찬익(1884∼1949)을 만났다. 정원택은 신규식의 밀지를 박찬익에게 보여주며 미주, 상하이, 일본, 국내 등 각 지역에서의 기밀(機密) 독립선언 활동을 언급했다.
신규식의 밀지를 본 박찬익은 까만색 선글라스에 카이저수염을 한 상하이의 ‘멋쟁이 형님’ 신규식이 그리웠다. 박찬익은 국내에서 관립 공업전습소에 다니던 시절 신규식과 만나 결의형제(結義兄弟)한 사이였다. 1909년 대한제국의 공업 발전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창간한 잡지 ‘공업계’의 사장 겸 편집인이 신규식이었고, 발행인이 박찬익이었다.
박찬익과 정원택은 신규식의 밀명을 따라 서간도와 북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우선 정원택은 우편국의 우편상(郵便箱·우편함)을 이용한 암호로 조소앙(조용은·1887∼1958)과 연락을 취했다. 동제사 요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엽서에 기재한 뒤 통신 주소로 발송하는 방법이었다.(정원택의 일기인 ‘지산외유일지’·이하 등장하는 날짜는 음력 일기를 양력으로 환산한 것임)
○ 갈등하는 사상가
1월 26일 정원택은 지린성의 동문(東門) 밖 외딴곳의 도관(道館·도교 사원)에 머물고 있는 조소앙과 접선했다. 도관을 거처로 삼고 있는 것을 보니 과연 ‘소앙다웠다’. 유달리 큰 머리가 돋보이는 조소앙은 메이지(明治)대 법학과 졸업생답지 않게 종교가 혹은 사상가적 면모가 물씬 풍겼다.
춘원 이광수는 1913년 상하이에서 조소앙과 함께 지내던 시절 “그(조소앙)는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서 코란을 읽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눈을 반쯤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이광수 ‘나의 고백’)
당시 조소앙은 동제사가 운영하는 박달학원 교사로 활동하면서, 틈만 나면 이슬람교 등 세계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거나 명상을 즐겨하곤 했다. 1914년에는 독립운동 차원에서 단군을 필두로 동서양의 여섯 현자를 모시는 육성교(六聖敎)라는 독자 종교를 구상하고, ‘일신교령(一神敎令)’이라는 경문까지 작성했었다. 그러니 조소앙이 도교 도사들이 거주하는 도관에 머물고 있는 것도 그리 이상스럽지 않았다.
지린의 날씨는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두 사람은 따뜻한 인삼차를 달게 마시며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조소앙이 만주에서 거동이 수상한 자로 지목돼 중국 경찰에 붙잡혔을 때 정원택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준 일도 있었다. 이런저런 신상 얘기를 나누며 차 한 잔을 다 마실 무렵, 정원택이 본론을 꺼냈다.
정원택이 하루가 급하다며 속히 활동하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동제사 요원 조소앙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서간도로부터 여기 올 때에 결의한 바가 있었소. 앞으로는 도관에 잠적하여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으며 사람과 논쟁하지 않고, 다만 홀로 수양하기를 결심하였으니 나를 내버려두시오.”
조소앙이 담담하게 말했다. 뜻밖의 말에 정원택은 충격을 받았다. 일찍부터 신규식과 함께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해온 조소앙이 아닌가. 그의 형인 조용하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중국으로 망명한 후 만주와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고, 그의 동생 조용주 역시 형(조소앙)을 따라 망명한 후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조용히 수양이나 하면서 은둔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조소앙은 고뇌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막을 거두어갈 무렵, 재외 한인사회는 단결의 희망이 털끝만큼도 없었으며, 국내의 대중들 또한 고요하게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마음이 매우 초조하여 동북지역의 한인들을 규합할 결심을 하고 단신으로 그곳으로 갔다. 당시 한인 교포사회의 거물들은 제각기 영웅으로 자처하면서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의 희망이 없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지린성에서 칩거하면서 독서를 했다.”(조소앙 ‘자전·自傳’·1943년 발표)
그가 1946년 국내에 귀국한 뒤, 1919년 3·1운동 전후를 회고하는 글에는 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저윽히 우리 민족의 단결성의 결여를 개탄하고 실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조계(早計)이며 오산이었다. 그 기운이 농숙하고 그 시기를 포착하면 우리 민족보다 더 단결이 강한 민족도 다시없는 것을 나는 3·1운동에서 발견하고 교훈받았다.”(조소앙 ‘3·1운동과 나’·자유신문 1946년 2월 26일자)
조소앙은 국내에서 3·1혁명의 불꽃이 일 때까지는 같은 피를 나눈 민족끼리 단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넘어 거의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독립선언서의 원조, 대동단결선언
조소앙으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이 담긴 ‘대동단결의 선언’(대동단결선언)이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1917년 7월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동지들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작성해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들에 배포했다. 독립운동에는 무엇보다도 대동단결이 필요하다는 취지하에 국내외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무상법인(無上法人)’이라는 기구, 즉 정부를 조직하자는 선언서였다.
동제사의 주요 요인들이 선언서의 발기인으로 등재했다. 동제사 수장 신규식을 필두로 조소앙, 신석우,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김규식, 윤세복 등 14명이었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명기된 선언서인 만큼 무게감도 작지 않았다.
특히 조소앙이 기초한 대동단결선언은 (대한제국) 황제의 주권이 국민에게 선양되었음을 공개적,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국의 독립 이후 건국할 국체(國體)는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주권 국가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융희황제(순종)가 삼보(三寶·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경술년(1910년)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의 최초의 날이니, 무슨 까닭인가. 우리 대한은 무시(無始) 이래로 한인의 한이요 비(非)한인의 한이 아니니라. 한인 사이의 주권을 주고받는 것은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이오. 비한인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요, 한국의 국민성이 절대 불허하는 바이라.’(‘대동단결선언’)
이는 당시 침체돼 있던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하는 ‘혁명적’ 선언이기도 했다. 사실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던 시점은 국내외 독립운동이 최악의 국면에 처해 있었다.
1911년 일제는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해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조직한 신민회 간부 등을 대거 체포했다. 서북지방의 항일 민족조직인 신민회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미국으로, 김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는 등 국내 거점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어 국내 의병조직인 독립의군부(1912∼1914년)와 대한광복회(1915∼1918년)마저 잇따라 발각돼 의병운동도 와해됐다.
국외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1915년 이상설과 신규식 등이 중국에서 신한혁명당을 설립해 광무황제(고종)를 옹립하는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 역시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 즈음에 대한제국 황제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방략인 보황주의(保皇主義) 노선을 완전히 종결하는 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한 조소앙은 삼보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 이상 이를 행사하는 주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국내 동포는 현재 일제에 구속돼 있으니 그 책임을 해외 동지가 감당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해외 각 지역 민족대표들이 회의를 열어 유일 최고기관을 수립하자고 제안했다.(조동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이 선언은 후에 3·1운동의 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가 됐다. 동제사 이사장 신규식과 총재 박은식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발행한 주간지 ‘진단’ 창간호에서 대동단결선언을 ‘제1차 상해선포(上海宣布)’라고 명명하며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선언서가 발표된 당시의 호응은 신통치 않았다. 선언서는 ‘신한민보’(북미주), ‘국민보’(하와이), ‘한인신보’(블라디보스토크), ‘청구신보’(우수리스크)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것이나, 이에 호응해오는 단체는 거의 없었다. 조소앙은 적잖이 실망했다.
조소앙은 이어 1918년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서 한인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도모하려고 했다. 이마저 실패했다. 그의 표현대로 각자 영웅으로 할거한 단체들이 하나도 호응해오지 않았다. 이는 동제사 요원 박찬익도 느끼고 있던 점이다.
“독립운동에서 무력을 갖춘 군사 활동이 중요하다고 하여 저마다 무장 단체를 만들었다. 몇 사람의 부하를 가진 사람도 제가 독립군 대장이고, 100명, 1000명을 가진 사람도 저마다 독립군 대장이라고 뽐내는 지경이었다. 같은 길을 가면서도 저마다 이론을 내세우면서 하나가 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남파 박찬익 전기’)
○ “다시 대호(大呼)할 기회가 왔소”
정원택은 정신 수양이나 하며 살겠다는 조소앙을 설득했다.
“나나 선생(조소앙)이나 그 밖의 여러 동지들이 국치(國恥) 후에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만리절역(萬里絶域)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달게 받고 있음은 모두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말에 따라 시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었소. 이제 서방의 전우(戰雨)가 처음 개고 파리에서 평화가 열리게 되어 약소민족이 자결을 고창(高唱)하니, 일은 비록 미비하나 때는 왔소. 일의 성패를 계산하지 말고 한 번 궐기하여 대호(大呼)할 기회라. 이 기회를 놓치고 어느 때를 기다리리까. 잠적 수도는 늙어서도 늦지 않소.”
마침내 조소앙의 마음이 움직였다. 정원택과 조소앙은 박찬익이 머물고 있는 객잔에서 함께 만난 뒤 지린성 북문 바깥의 여준(1862∼1932)의 집에서 활동 방침을 토의했다.
1919년 2월 말 신흥무관학교 교장 출신인 여준의 집으로 서간도와 북간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소문을 듣고 거사 자금을 쾌척하러 온 이들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김모(金某)가 만주의 황무지 개간 사업차 지린에 왔다가 자금 중 6000원을 제공했다. 또 충남 사람 정명선이 1000원을 독립운동에 쓰라고 내놓았다.
드디어 2월 27일 여준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됐다. 나이가 가장 많은 여준이 총재로 추대되고, 총무 겸 외무에 박찬익, 재무에 황상규, 군무에 김좌진, 서무에 정원택, 선전 겸 연락에 정운해 등이 피선됐다. 상하이에 파견할 지린 대표로는 조소앙이 선정됐다.(‘지산외유일지’)
대한독립의군부는 대일 무력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그 이듬해(1920년) ‘청산리 전투’로 명성을 떨친 김좌진이 무력에 필요한 마필과 무기 구입을 책임졌다. 또 대한독립의군부 주도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도쿄의 2·8독립선언과는 달리 무력 사용을 독립운동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세칭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선언서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날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음 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주요 등장인물
조소앙: 1887년 경기 파주 출생.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부장 지냄. 삼균주의 주창.
박찬익: 1884년 경기 파주 출생.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서명한 39인 일원. 1940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 지냄. 한국광복군 창설 주도. 정원택: 1890년 충북 음성 출생. 1912년 동제사 요원으로 활약.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해 독립선언서 제작 및 배포.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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