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27일 중국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지린(吉林)성의 여준(1862∼1932) 집에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은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하 의군부)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름 그대로 무력을 행사하는 결사대였다.
의군부는 파리강화회의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급조한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그 위상은 만만찮았다. 만주 독립운동의 주축 세력이 모처럼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의군부를 대표하는 정령(正領·총재) 여준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교장 출신으로 서간도 일대에서 명망을 얻고 있는 선각자였다. 군무(軍務)를 책임진 김좌진(1889∼1930)은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의 부사령(만주 지역 책임자)으로 활동하는 열혈 투사였다. 게다가 비밀독립단 동제사의 요원 조소앙, 박찬익, 정원택 등도 합세했다. 그만큼 결속력과 실천력이 강했다.
의군부는 즉시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키로 했다. 선언서 작성에는 대동단결선언의 주역인 조소앙이 기초(起草)를 하고, 정원택은 선언서의 인쇄 및 발송을 맡기로 했다.(정원택, ‘지산외유일지’)
마침내 대한독립선언서가 완성됐다. ‘단군기원 4252년(1919년) 2월 일’ 날짜가 명기되고, 모두 39인의 서명이 기재된 선언서였다. 세칭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이 선언서는 일본을 사기강박(詐欺强迫), 불법무도(不法無道), 무력폭행(武力暴行)을 일삼는 ‘악마적’ 존재로 규정했다.
“슬프도다, 일본의 무뢰배여. 임진왜란 이래로 반도에 쌓은 악은 만세에 가리어 숨기지 못할지며, 갑오(甲午·1894년)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이 용납하지 못할지라. 전쟁을 좋아하는 저들의 악습은 자보(自保)니 자위(自衛)니 하는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리는 보호합병을 멋대로 하고, … 군경의 무단과 이주민의 암계(暗計)로 한족(韓族)을 멸하고 일인(日人)을 증식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대한독립선언서)
선언서는 강렬한 문구로 일본을 비난했다. 또 일본은 절대 함께하지 못할 동아시아의 적이자, 세계문화의 발전을 저지한 인류의 공동 적이라고 하면서 2000만 동포의 총궐기를 촉구했다.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임을 명심하여, 황천(皇天·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일체의 사악한 굴레에서 해탈하는 건국임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 지어다!”
○ 만주와 도쿄의 교감
대한독립선언서는 ‘육탄혈전’을 독립 쟁취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국내 3·1독립선언서가 평화주의를 주창한 것과 달리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는 처음부터 무력을 내세웠다.
일가(一家)를 희생하여 독립전쟁을 치르자는 대한독립선언서의 혈전주의(血戰主義)는 도쿄의 2·8독립선언서에도 이미 나타났다. 도쿄 유학생들은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하겠노라”고 선포했다. ‘혈전’이라는 용어에서 두 선언서의 작성 과정에 일정한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지산외유일지’의 저자이자 조소앙의 선언서 작업에 참여했던 정원택의 증언이 흥미롭다. 정원택은 “대한독립선언서 말미에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문구는 조소앙의 동생 조용주(1889∼1937)에 의해 첨가된 것”이라고 증언했다.(김용국, ‘지산외유일기해제’)
조소앙보다 두 살 아래인 조용주는 형을 따라 일찌감치 상하이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다. 조용주는 형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할 때도, 또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도 그림자처럼 보필했다. 그런 조용주가 대한독립선언서에 ‘혈전’이라는 용어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조용주가 도쿄의 2·8독립선언서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제사의 밀명으로 도쿄의 독립선언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조용운’의 실체가 조용주(혹은 또 다른 동생인 조용원)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당시 일제는 조용운을 조소앙(본명 조용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등경찰요사’)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도 도쿄와의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원택은 1919년 3월 11일 선언서를 석판(石版)으로 4000부 인쇄한 뒤 일본, 미국, 러시아 등 해외 각지로 배포했다.(‘지산외유일지’) 그런데 이것이 일제의 감시망에도 포착됐다.
“미령(美領·미국령) 및 노지령(露地領·러시아령)의 선인(鮮人·한국인)을 통해 이승만 이하 39명의 서명으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가 최근 노령에서 간도로 송부돼와 각지에 배부 중. 본 선언서는 조선 내지(內地) 및 도쿄(東京) 방면에도 송부된 형적이 있어 수배 중.”(일본외교사료관, ‘조선경무총장이 척식국장관에게 보낸 친전’, 1919년 4월 19일자)
그간 얘기로만 나돌던 도쿄에서의 대한독립선언서 배포가 사실이었음을 밝혀주는 일제 기록이다.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가 나돌았다는 사실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한국 유학생들과의 연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이숙화, ‘대종교의 민족운동 연구’)
○ 엇갈리는 기억
이상은 정원택의 일기를 토대로 살펴본 대한독립선언서의 탄생 비화다. 정원택의 일기는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시대 상황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희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결정적 문제가 있다. 일기에 적어 놓은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 날짜가 정작 선언서를 기초한 조소앙의 증언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정원택의 일기를 따르자면 의군부는 1919년 2월 말에 조직됐고, 선언서는 3월에 들어서서 완성 및 반포된 셈이다. 반면 조소앙은 이렇게 기억했다.
“1919년 1월에 이르러 여준, 김좌진, 박남파(박찬익), 손일민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대한독립의군부를 창립했다. 여준은 정령(正領)이 되고 나는 부령(부총재)의 임무를 맡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손수 기초했다. 국내 대표(나경석)가 가져온 (3·1)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살펴보고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였다.”(조소앙, ‘자전(自傳)’)
이 글은 1943년 4월 조소앙이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을 때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조소앙은 1월(양력으로는 2월)에 의군부가 조직됐고, 국내의 3·1독립선언서 초고를 받기 전에 이미 대한독립선언서를 완성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조소앙의 또 다른 회고(3·1운동과 나, ‘자유신문·1946년 2월 26일자’)를 보더라도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는 1919년 2월 중·하순의 일로 추정된다.
조소앙의 회고는 정원택의 기록과 사건 전개 과정은 기본적으로 일치하나, 날짜에서는 보름가량 차이가 난다. 이는 3대 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 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해묵은 논쟁의 불씨가 됐다. 그간 대한독립선언서의 날짜 표기인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을 1919년 양력 2월 1일로 보고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에 앞선 것으로 평가돼 왔다.
최근 정원택과 조소앙의 엇갈리는 기록을 최종 판가름해 줄 수 있는 자료를 입수했다. 대한독립의군부 조직과 국외 독립선언운동의 ‘배후’인 동제사의 수장 신규식이 1920년에 발간한 주보(週報) ‘진단(震壇)’에서 주요 독립선언서의 발표 순서를 명확히 나열한 것이다.
“근년(近年) 이래로 중요한 선언으로는 공히 5차례가 있었다. 최초는 상해선포(上海宣布, 대동단결선언)이다. 그 두 번째는 동경선포(東京宣布, 2·8독립선언서), 세 번째는 길림선포(吉林宣布, 대한독립선언서), 네 번째는 한국 경성선포(京城宣布, 3·1독립선언서), 다섯 번째는 해삼위선포(海參威宣布, 연해주독립선언서)다.”(震壇 창간호, ‘國內外韓人之獨立宣言’ 8면 기사, 1920년 10월 10일자)
‘진단’은 3·1운동을 전후해 중요한 의미가 있는 독립선언서로 5개를 꼽았다. 여기서 ‘진단’은 1919년 2월 8일 도쿄의 독립선언서와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서 사이에 지린(吉林)의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으로 ‘서열’을 매긴 것이다. 그것도 동제사 수뇌인 신규식과 박은식이 이름을 걸고 발행한 잡지인 만큼 기록에 대한 신뢰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이 자료는 그간의 해묵은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 자료”라고 평가했다.
한편 대한독립선언서는 지린, 상하이, 서간도와 북간도, 미주, 노령 등 국외의 지도자급 운동가 39명이 서명했다. 이 중 민족종교인 대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대한독립선언서 작성을 실제로 주도한 독립의군부의 중심 인물인 여준(정령), 박찬익(총무 겸 외무), 김좌진(군무), 황상규(재무), 정원택(서무) 등이 모두 대종교 교인이었다. 이승만, 김약연,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박용만, 안창호, 이대위 등은 기독교 지도자들로서 이 선언서에 참가했다. 조국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기독교와 대종교는 무경계적 합심(合心)을 했다.
○ 북만주 3·1운동의 현장
기자는 대한독립선언서가 작성된 지린시를 떠나 선언서가 선포된 곳으로 알려진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허룽(和龍)시를 찾아갔다.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중의 한 명인 윤세복(1881∼1960)이 허룽의 대종교총본사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선포가 이뤄졌다고 회고한 기록을 따라서다.(신철호, ‘대종월보·제30호’, 1979년 기고문)
대종교총본사 터는 지린시에서 동남쪽 도로로 500여 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종교는 국내에서 일제에 의해 포교금지령(1915년 10월) 조치를 받은 후 같은 해 11월 허룽현의 중국 당국으로부터도 포교 금지령을 받았다. 따라서 독립선언서 선포도 비밀리에 이행됐다고 한다. 김동환 연구원은 대한독립선언서의 공식 발표가 드러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재 허룽시 청호(淸湖)마을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몇 가구의 촌락이 형성돼 있을 뿐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종교총본사 터에는 현대식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다만 청호마을을 굽어보는 청호종산의 낮은 구릉에 모신 ‘대종교 삼종사 묘역’만이 옛적 일을 회고하는 듯했다. 대종교를 이끈 홍암 나철(1863∼1916), 무원 김교헌(1868∼1923), 백포 서일(1881∼1921) 등 3인은 민족운동가이자 항일지사로 활약했다.
대종교총본사는 백두산 천지를 기준으로 동북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매년 6월 20일경 하지(夏至)에 해가 떠오르면 대종교총본사와 백두산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하지일출선(夏至日出線) 상의 배치다. 옛 고구려인들이 그랬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하지일출선 방향에 중요한 건물과 왕의 무덤 등을 배치했다. 가장 왕성한 해의 기운을 받아들이려는 풍수적 의도였다. 민족종교 창시자인 나철이 백두산을 순례한 후 일찌감치 이곳 청호마을을 본사로 점찍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이후 독립 만세의 함성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울려 퍼졌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의 3·1운동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옌볜조선족자치주의 룽징(龍井)의 장날인 3월 13일 옌지(延吉), 허룽, 투먼(圖們) 등지에서 3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룽징의 벌판(瑞甸大野)에 가득 모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악명 높은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행진했다. 명동학교 학생 등이 태극기를 들고 앞장섰다. 그러나 시위 과정에 1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북간도 최대 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은 유혈로 낭자했다.
중국 지방 군벌인 맹부덕 부대와 일제 군경의 야만적인 진압 행위에 분노한 한국인들은 각 도시와 농촌에서 일제히 시위에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무장 투쟁론이 전면으로 부상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육탄혈전주의는 이후 만주 독립운동의 쾌거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이어진다.
룽징·허룽=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주요 등장인물
여준: 1862년 경기 용인 출생. 1906년 북간도 룽징에서 이상설(헤이그 특사)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 학교 운영. 1913년 신흥무관학교 교장, 1915년 부민단 교육회장 등을 역임.
김좌진: 1889년 충남 홍성 출생. 1910년 대한광복회 요원으로 군자금 모집 활약. 1919년 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독립군 양성.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둠.
나철: 1863년 전남 보성 출생. 1910년 민족종교 대종교를 창교해 독립운동에 투신.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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