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여성 짓밟는 천년 빙설 깨지는 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2일 03시 00분


‘작가의 사랑’ 출간 문정희 시인
“생명 소중히 여기는 깨달음 기회… 남성들도 페미니즘 공부해야”

“‘미투 운동’에 따른 파장은 여성의 생명을 짓밟아 온 천년 빙설이 깨지는 소리입니다. 한국의 딸들이 깨어난 것이죠.”

밟히고 스러져간 여성들을 위무하는 작품을 담은 새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을 출간한 문정희 시인(71·사진)은 ‘미투 운동’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지난달 29일 그를 만났다. 일찍이 페미니즘에 눈을 뜬 그는 작품을 통해 때론 비명처럼, 때론 거침없이 여성의 목소리를 내왔다. 열네 번째 시집인 ‘작가…’에는 성폭행을 당한 후 유명 남성 문인들에게 조롱받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가 김명순의 혼을 달래는 ‘곡시(哭詩)’가 실렸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70여년/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곡시’ 중)

해방 공간에서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한 김수임을 그린 ‘애인’, 성폭행 신고를 했지만 도리어 경찰에게 2차 피해를 입고 한국을 떠난 이방인 여성을 다룬 ‘딸아’ 역시 여성에게 닥치는 잔인한 현실을 고발한다. 그는 작품을 쓰기 위해 관련 논문과 각종 자료를 일일이 찾아보며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가장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이런 진혼가가 나왔어요. 우리 사회가 욕망을 너무 부추긴 결과 공격적 남성성을 강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미투 운동’이 혈투에 그치지 말고 생명을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여기는 궁극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남성과 여성 모두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페미니즘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건 생명입니다. 생명을 짓누르는 야만적인 세상에서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집에는 어릴 적 가족을 잃은 상처, 살기 위해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버둥거리는 코미디언, 호기심을 안고 세계 곳곳을 누빈 그의 궤적도 담겼다.

“가장 생생한 생명성이 있는 작품을 골랐습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았어요. 말 그대로 내 피와 살에서 나왔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내년이면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죽는 순간에 ‘아, 실컷 썼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탐스러운 꽃처럼 시를 마음껏 발현해낸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미투 운동#작가의 사랑#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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