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굿빛 원피스를 입고 은회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안무가 아너 테레사 더케이르스마커르(58·사진). 경쾌한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오자 양팔을 바람개비처럼 가볍게 회전시켰다. 그의 반복적인 ‘턴’ 동작으로 하얀 모랫바닥엔 꽃잎을 연상시키는 원형 궤적이 만들어졌다. 무용과 음악, 회화가 어우러져 하나의 종합 예술로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벨기에의 포스트모던 댄스 안무가 더케이르스마커르의 ‘파제, 스티브 라이시 음악에 대한 네 가지 움직임’ 가운데 3부 ‘바이올린 페이즈’가 2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선을 보였다. 회화와 음악, 무용이 합쳐진 16분짜리 작품은 그가 불과 22세 때 발표한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날 한국에서의 첫 번째 공연을 앞두고 미술관에서 만난 더케이르스마커르는 “젊은 시절, 나만의 무용 언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작품”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파제…’는 절제된 감정과 동작이 주요하게 다뤄지던 1980년대 무용계에 감정적 요소를 새로이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980년대에 포스트모던 댄스가 주를 이루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습니다. 역동적인 도시 분위기가 많은 영감을 줬지요. 그즈음 우연히 스티브 라이시의 음악을 접했는데, 마치 나를 초대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20세기 당시엔 음악과 무용의 관계를 경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라이시의 음악을 통해 그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었습니다.”
2일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1층 로비에 마련된 공연장에서 더케이르스마커르는 규칙적인 턴과 점프 동작을 진행하려다 말고 엇박자로 멈춰 서기를 반복하다가 후반부엔 독창적인 다른 안무 동작이 녹아들도록 했다. 라이시의 미니멀리즘적인 음악을 적용하고 변형한 것이다. 실제로 라이시의 음악은 ‘론도’(주제를 같은 상태로 여러 번 되풀이하는 형식)와 ‘페이징 기법’(반복되는 악절을 일치시켰다가 다시 불일치시키는 전개)을 사용해 작곡됐다.
“라이시의 음악은 구조가 엄격하고 절제됐지만 이 덕분에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내고 있습니다. 20세기 음악은 박자나 화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아프리카 음악에서 나타나는 박자감이 기계적일 정도로 두드러집니다.”
본래 ‘블랙박스’라고 불리는 극장에서 공연돼 온 더케이르스마커르의 ‘파제…’는 미술관에선 흰 모랫바닥에 생기는 궤적을 통해 회화적 요소가 주는 감흥이 크다. 미술관에서 공연을 선보이는 경우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MUDAM)에 이어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이 세 번째다. 이를 두고 더케이르스마커르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바뀌었다”고 자평했다.
“극장엔 정면이 존재하지만 미술관에선 이 개념이 사라집니다. 더 자유롭고 관객과의 거리도 가까워집니다. 시간감, 공간감이 재배치되는 거죠. 앞으로도 작품이 극장 밖으로 나가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더케이르스마커르의 ‘파제…’가 발표된 뒤 미국이 선도하던 포스트모던 댄스는 유럽으로 그 중심이 옮겨갔다. 장르의 경계가 없는 동시대 예술의 새 경향을 소개하는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18’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이번 공연은, 공지 2주 만에 회당 180명씩 총 6회 공연 예약이 빠르게 마감됐을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춤을 ‘써 내려가는’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연과 인간의 에너지에 영감을 받아 시공간을 확장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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