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여행을 대신해주는 사람이다. (중략) 몇 차례의 조율이 끝나고 출발일이 정해지면, 공식적으로 또 대외적으로, 나의 의뢰인을 한동안 ‘여행 중’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국경의 도서관(황경신·소담출판사·2015) 》
휴가를 떠날 때면 새로 산 한 권의 책을 챙긴다. 베스트셀러인지, 장르가 무엇인지, 작가가 누구인지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눈길 가는 대로, 손길 가는 대로 한 권을 골라 그대로 가방에 담아 비행기를 타곤 한다.
국경의 도서관도 그렇게 손에 쥐여져 있었다. 책을 펴자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이 누군가의 여행을 대신해주는 1인칭 화자 ‘나’였다. 누군가의 여행을 대신해준다니. 상상해 본 적 없는 직업이다. 꽤 부러운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직업이 존재하는 이유를 꽤 장황하게 설명한다.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이 있지만 여행 경험이 없다고 고백하면 인생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사람들, ‘여행 중’이라는 팻말을 걸고 한동안 잠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들이 ‘나’의 고객이다.
소설 속에서 ‘나’는 스토리가 필요한 영화감독의 의뢰로 대리 여행을 떠난다. 영화 제목 ‘바나나리브즈’를 염두에 두고 여행에서 떠오른 몇 개의 단어를 전해주면 되는 조건이었다.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이어질지 호기심이 더해갈 때 갑자기 맥이 딱 풀렸다. 영화감독이 ‘나’에게 “바나나는 잊어버려요”라고 말한 뒤 바나나 잎으로 싸먹는 구운 생선요리를 먹으러 가기로 하며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시작도 전에 끝나다니….’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은 38개의 서로 다른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이야기를 엮은 책이었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우체통이 말을 걸고, 책갈피가 한탄을 한다. 슈베르트와 셰익스피어가 살아 돌아와 본인의 심정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것도 모르고 책을 펴들었다가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며 맥이 풀린 것이다.
그런데 경계가 없다보니 오히려 여운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야기를 스스로의 상상으로 늘려보고, 압축도 해보니 전혀 다른 소설 여러 권을 읽은 느낌이었다. 무딘 경계가 더 큰 세상을 만들어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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