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소고기는 특별하다. 한때 이런 개그도 유행했다. “취업하면 뭐하노, 잘됐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결혼하면 뭐하노. 좋다고 또 소고기 사먹겠지.” 한국인에게 소고기는 이런 존재다. 삶의 모든 기쁨과 벅찬 감격이 대부분 소고기로 마무리된다. 거의 완전체적인 존재랄까.
소고기에 대한 한국인의 갈망은 사실 유래가 깊다. 20세기를 살아온 우리 조부모들은 ‘니밥에 괴기국(쌀밥에 소고기국)’ 먹는 세상을 꿈꾸며 달려왔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소고기는 사람을 가장 이롭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고기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이 이토록 절박한 문제였음에도” 학술적으로 해명된 적은 없었다. 주로 조선시대 역사를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소고기 역사를 통해 조선시대 문화를 되짚는 신선한 시도를 한다.
책에 따르면 소가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식탁에 올라온 건 조선시대부터였다. 고려시대에는 키우는 수도 적었고 불교의 성행으로 육식 선호도가 낮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들어 소는 농업의 근간이자 왕실부터 양반, 일반 백성까지 모두 열광한 탐식의 대상이 됐다. 저자는 “요즘의 ‘치맥 인기’에 비견할 만했다”고 평가한다.
물론 소고기는 함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소고기는 국왕의 품격을 상징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 먹다간 큰일을 당했다. 명종 당시 박세번은 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무인들과 소를 잡았단 이유로 “반역의 흔적이 있다”며 처단됐다. 조선 전기 무신인 남이는 국상 중에 소고기를 먹었다가 체포됐다. 중종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연산군이 소를 너무 도살하고 소고기를 남용했다는 점이기도 했다.
소의 도살은 관의 허락하에 이뤄져야 했다. 소의 수가 곧 국력이었으므로 나라에서 소의 개체수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세조 때는 소를 사육할 경우 국역을 면제해주는 정책을 펴기도 했고 17세기 이후에는 우역이 만연하자 소 도살을 금지하는 강력한 우금령을 내리기도 했다. 유일하게 소고기를 마음껏 먹는 집단은 공부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소고기로 달래는 게 허락된 성균관 유생들이었다. 재밌게도 서울 도성 내 유일하게 소 도축이 하가된 장소가 성균관이었다.
왕실 및 양반과 달리 일반 백성들은 소고기를 즐기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통념과 달리 백성들도 소고기 잔치를 자주 벌였다고 말한다. 18∼19세기 초까지 새해에는 열흘간 허가 없이 도살할 수 있었고 제사 등의 핑계를 들어 도축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 당시엔 설날, 단오 등 네 번의 명절에 2만∼3만 마리를 잡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인구로 나눠 보면 1인당 100g 안팎으로 돌아간다. 저자는 “조선시대 1인당 소고기 섭취량이 20세기 말 한국인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당시 소 한 마리 값은 쌀 한두 가마니(현재 한 가마니 기준 20만 원 미만)로 현재와 비교하면 무척 저렴했다.
책을 보다 보면 소와 소고기에 대한 조선의 ‘이중적 갈망’이 뚜렷하게 읽힌다. 소가 곧 국력이 되는 농업사회에서 소만큼 귀한 가축은 없었지만 다들 시시때때로 입맛을 다시며 살았다. 이규보는 “어찌 차마 그 고기를 먹으리오”(‘소고기를 끊다’)라고 노래하면서도 “눈으로 보고서는 즉시 안 먹을 수 없다”(‘병서’)고 소고기의 마력 같은 힘을 고백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지극한 소고기 사랑이 생각보다 더 깊은 내력과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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