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동물원, 미국·러시아 소설과 음악에 푹 빠진 내성적인 소년이 있었다. 대학 강의실보다 카페 영화관 음반 가게를 더 자주 다닌 무라카미 하루키(69)는 7년 만에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문화와 여행을 좋아하는 그의 논문 제목은 ‘미국 영화에서 여행의 사상’이었다.
22세 때 와세다대 동문인 요코와 결혼한 그는 ‘피터 캣’이라는 재즈 카페를 열고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고단한 일상을 견디며 쓴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년)로 신인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한다. 전업작가가 돼 쓴 ‘양을 둘러싼 모험’(1982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년)는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문단에서는 혹평이 쏟아졌다. “버터 냄새가 난다” “비치 보이스나 맥도널드 등 미국 브랜드를 남발한다”며 ‘미국 팝 문화 숭배자’라고 공격했다.
오해와 비판을 피해 하루키 부부는 1986년 세계를 방랑하기 시작했다. 영국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비틀스의 음악을 들으며 ‘노르웨이의 숲’(1987년)을 집필했다. ‘상실의 시대’로 국내에 번역된 ‘순도 100% 연애소설’은 공허한 전 세계 청춘들의 심장을 훔쳤다. 격동의 전환기를 겪었던 1990년대 초 동유럽 및 러시아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독일에서 하루키 소설들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사 마라톤 중고음반 수집이 취미인 그는 40대 초반 미국 보스턴에서 5년간 ‘상주여행자’로 지내며 행복한 전성기를 누린다. 아이비리그 대학의 지식인들과 토론하고 찰스 강변을 달리며 소설과 번역서를 계속 냈다. ‘뉴요커’에 단편소설이 실리며 미국에서 정식 소설가로 데뷔하는 꿈도 이룬다.
그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원조다. 맥주 와인 위스키와 함께 나물 샐러드 면류 해산물 요리를 즐기는 미식가이기도 하다. 선호하는 여행지는 인구가 적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 아이슬란드 핀란드 등 북유럽,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산지, 불교 국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미국 서부의 포틀랜드와 캘리포니아 내파밸리 와인 산지가 그의 행복 밀집지역이다.
‘자살보다 이사, 섹스보다 여행’을 지향하는 그는 성실한 작가의 삶을 40년 가까이 지속해 왔다. 섹스 장면마저 담백하게 묘사해 여성 팬이 많은 ‘하루키 월드’에는 아버지가 없다. 실제 그의 친부는 교사로 은퇴한 후 승려로 수도하다 생을 마감했다. 혼인신고를 하고 처가에 들어간 그는 양성평등적 부부생활을 이어왔다. 평생 파마, 화장을 한 번도 안 했다는 동갑내기 아내는 순수한 소녀 스타일이다. ‘열대 섬에서 과일을 따먹으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꿈’이라는 그녀는 하루키 소설을 맨 처음 읽는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그의 인세 수입을 포함해 모든 것을 관리하는 유능한 매니저다. 하루키의 인생 여행 파트너, 요코는 “지도 잘 그리는 여자를 보면 당장 사랑에 빠질 것만 같다”는 그의 이상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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