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월요일에 신문이 나오기 때문에 기자들은 번갈아 가며 일요일 근무를 선다. 이날은 내 정식 근무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쓴 기사가 출고되는 날이라 챙겨야 할 일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새벽부터 깨서 복닥거렸다. 어린이 음악 CD를 틀어주고 잠깐이라도 더 자려고 안방에 들어와 누웠다. 전날 시댁에 다녀와 늦게까지 정리하고 잔 터라 좀 피곤했다.
어느 순간 바깥이 조용한 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조용하다는 건 보통 사고를 치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자 둘째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불안한 얼굴, 흔들리는 눈빛은 누가 봐도 ‘나 잘못했어요’ 라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동생이 방에 색칠을 해서 나랑 큰큰언니(동생들은 첫째를 제일 큰 언니란 뜻에서 이렇게 부른다)가 닦고 있었어”라 했다. 둘째는 새파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막내의 천기저귀를 들고 있었다.
그 기저귀 색 만큼 새파랗게 질려 아이들 방으로 갔더니 오 이럴 수가 신이시여…난장판이었다. 종이벽지에 새까만 색칠이 가득했고 시커먼 물이 바닥까지 흘렀다. 뿐만 아니라 애들 가구와 침대 매트, 이불까지 모두 빨갛고 파란 물 범벅이었다.
예전에 아이들에게 ‘물감 색연필’을 사준 적이 있는데 색칠한 뒤 물을 칠하면 마치 물감처럼 번지는 그런 색연필이다. 아직 어린 동생들이 사용하기엔 무리인 것 같아 아이들 방 창고 안에 숨겨뒀는데. 엄마가 자는 틈에 아이들이 꺼내 온 방에 색칠을 하고, 뒤늦게 ‘아차’ 싶었던지 천기저귀와 화장실 수건, 물티슈를 가져다 닦아놓은 거였다. 그냥 진작 엄마를 불렀으면 될 걸.
방은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침 남편은 일이 있어 아침 일찍 나간 상황. 평소 주말근무를 하면 남편이 아이들을 챙기지만 이날은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자다가 시간 맞게 일어나 애들 아침밥만 후딱 먹이고 일을 시작할 참이었다. 아아… 아이들과 살면서 일이 계획한 시간에 맞게 돌아가리라 기대한 내가 바보지.
“너희들…옷 벗어!” 고개를 숙이고 쭈뼛대던 셋은 차례로 옷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난 당장 친정엄마에게 ‘SOS’를 쳤다.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일단 오시라”는 딸의 요청에 어리둥절한 목소리였지만, 도착해 방 입구와 거실 곳곳에 난 발자국을 보시곤 이내 사태를 파악하셨다. “우선 애들 밥 먹어야 하니 씻고 나오면 밥만 좀 먹여주세요.” 그 사이 나는 빨리 방을 치워야 했다. 이미 휴대전화에는 기사와 부속물 관련한 회사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얼룩덜룩해진 물건들을 모두 욕실로 가져가 씻고, 침대 매트와 이불 커버를 벗겨 빨래를 돌리고, 걸레, 청소물티슈, 수세미와 세제를 동원해 벽과 가구를 닦았다. 종이벽지는 회복이 불가능했고 가구도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봤지만 예전 같이 하얘지긴 어려울 거 같았다. 침대 매트와 이불은 언제 말려서 다시 씌운다지? 불과 10분 전까지 세상모를 단잠에 빠져있었는데 이게 꿈이냐 생시냐…. 아이들 아침밥을 30분 만에 먹이고 만화영화 하나 틀어준 뒤 산뜻하게 일을 시작하려 했던 계획이 생각나자 헛웃음만 났다.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산뜻하고 여유로운 아침은 무슨.’
아이를 낳고 나서는 늘 이랬다. 여유로운 아침 따위 없었다. 모 대선 후보의 구호였던 ‘저녁이 있는 삶’ 역시 직장맘에게는 그저 ‘바쁜 저녁’이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 ‘시간빈곤층’에 관한 기사를 봤는데, 전문가들 분석 결과 역시나 시간 최빈곤층은 자녀가 있는 30대 직장맘이라 했다. 하루 평균 여가시간 173.9분(평균 302.5분). 더구나 이 시간은 돌봄시간과 거의 정확히 반비례했단다.
나 역시 하루 중 나만의 여가시간은 손에 꼽을 정도다. 아이들을 재운 뒤 집안을 정리하고 나면 자기 전까지 30분~1시간가량. 그나마 내 수면시간을 손해 보고 만드는 여가시간이라 휴식의 총량엔 변함이 없다. 그 시간에도 아이들 물품을 쇼핑하거나 찾아보기 일쑤라 온전히 내 여가시간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직장맘들은 하루 ‘투잡’을 뛰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침엔 회사로 출근, 저녁엔 집으로 출근. 아이들이 말썽을 부린 날 아침, 나 역시 정리를 마치고 일을 시작하려 컴퓨터 앞에 앉았더니 이미 하루 절반의 일을 마친 것처럼 진이 빠졌다.
친정엄마는 “지금도 이런데 넷째 나오면 어쩌느냐”고 한숨을 푹푹 쉬셨다. 까마득하긴 하다. 신혼 때 산 최신 사진기는 첫째가 장난을 치다 망가뜨렸고, 안방의 고급 가죽침대는 첫째와 둘째 두 자매가 낙서를 해 엉망이 된 지 오래다. 셋째 나온 뒤론 거실 벽이며 아이들 방 벽에 성한 곳이 줄어들더니 끝내 오늘에 이르렀다. 넷이 되면 가구를 부수려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기사가 잡히지 않아 남은 오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말썽을 피우긴 했지만 엄마 때문에 종일 TV 앞에 앉아있어야 했던 아이들에게 어디라도 나가고 싶은지 물었다. 첫째는 대답 대신 “엄마 이제 우리 방 벽이랑 가구는 어떻게 해요?” 하고 조심스레 되물었다. 나는 “아 몰라, 그냥 저렇게 살아야지 뭐” 하고 답했다. 그래, 넷째도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또 살아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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