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거친 도로 위에서 일군 삶을 향한 속깊은 시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9일 03시 00분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허혁 지음/234쪽·1만4000원·수오서재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길어 올린 언어는 단단하다. 따뜻하고 찡한 여운이 오래 머문다. 고향인 전북 전주시에서 5년째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저자가 빚어낸 산문은 그렇다. 18년간 가구점을 하다 가게를 접고 48세에 관광버스를 2년 몰다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됐다.

최근 고대하던 1일 2교대제를 시범 운행 중이지만 격일제로 했던 하루 18시간의 ‘악마적인 노동’은 친절이 마음이 아니라 몸의 문제임을 깨닫게 했다. 배차 시간에 쫓기고 불법 주차 차량을 피해 곡예하듯 정류장에 버스를 댄다. 식사는 물론 용변 해결도 종점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갈 길이 급한데 무릎이 불편해 버스 계단을 뒤뚱뒤뚱 오르는 할머니를 보면 짜증이 치솟는다. 하지만 마음을 밝게 하는 말을 찾아냈다.

“아직 젊고만 기어 올라온대요?”(저자) “아이고, 기사님 칠십이 넘어요.”(할머니)

다른 아주머니들이 “여자들 나이 먹으면 다 그리요”라며 한마디씩 거든다. 한참 만에 버스에 오른 할머니가 말한다. “젊었을 때 일을 하도 많이 히서 그리요.”

폐쇄회로(CC)TV 4대가 늘 돌아가고 있어 버스에 떨어진 10원짜리 하나도 가져가지 않는 버스기사일은 정직한 노동이라고 말한다. 석 달에 한 번 보너스에서 8만 원씩 내 운동장 사용료, 비품, 회식비로 쓰는 축구부원들을 보며 돈이 많아야 멋진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릴 적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작은 일에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려 노력하는 모습은 애잔하게 다가온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철학자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글을 읽다 보면 버스 운전기사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들 역시 감정과 애환, 각각의 역사가 있는 존재임을 환기하게 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허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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