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쌀보다 작은 크기였다. 육안으로는 앞뒤조차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오른쪽 눈에 확대경을 끼고 천천히 핀셋을 들이댔지만 나사는 마치 살아있는 듯 핀셋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길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슬금슬금 다가가 겨우 부품을 들어올렸다. 끼울 곳을 확인하고 핀셋을 벌리는 순간 나사는 ‘자유의 몸’이 되길 기다렸다는 듯 거꾸로 구멍 속에 처박혔다. 이마와 등에 긴 땀줄기가 흘렀다. 선선한 기운이 가득한 작업장에서 혼자 땀범벅이 됐다. 오랜 사투 끝에 겨우 초기 단계 조립을 마치고 나니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억 소리 날 만큼 비싼 이유가 있었구나.”
얼마 전 방문한 스위스 제네바 로저드뷔 매뉴팩처(Manufacture)에선 부품 생산부터 시계에 숨을 불어넣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급 시계의 탄생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자동화 시스템이 오래전 도입됐지만 여전히 상당 부분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시계 공장은 팩토리(Factory)가 아닌 공장제 수공업을 뜻하는 ‘매뉴팩처’로 불린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로저드뷔 매뉴팩처에서 직원이 동력장치(무브먼트)에 무늬 등 장식을 하고 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시계의 무브먼트 제조 과정. 제네바=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일반적으로 스위스 시계업체들은 매뉴팩처 내부를 선뜻 공개하지 않는다. 공개하더라도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촬영은 엄격하게 통제된다. 그러나 이날 로저드뷔는 생산공정을 살피는 것은 물론이고 사진 촬영도 흔쾌히 허락했다. 로저드뷔 관계자는 “기술력에 대해선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설계 도면만 찍지 말아 달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얀 작업복을 차려입고 여러 개의 보안문을 통과한 후에야 겨우 매뉴팩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지만 시계 장인들의 손길은 분주하면서도 섬세했다. 시계 동력장치(무브먼트)에 들어갈 부품을 만들고 세척하는 과정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기름 냄새가 짙게 밴 작업장에선 동전만 한 크기부터 확대경 없이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초소형 부품까지 수백 개의 ‘시계 재료’가 생산되고 있었다. 나사는 200, 300도가 넘는 고온에서 열처리를 한다.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데 원하는 색깔을 내기 위해선 작업자가 실시간으로 현장을 지켜봐야 한다. 보통 특수처리가 된 부품들은 일반 부품 가격의 몇 배에 달한다. 금속 부품 간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음매에 보석류도 사용된다. 무척 복잡해 보이지만 목적은 하나다. ‘정확한 시간’을 제공하는 것.
부품을 조립하고 무브먼트에 무늬를 새기는 작업장에는 현미경까지 등장했다. 아주 작은 크기의 부품을 시험 삼아 책상에 떨어뜨린 뒤 찾아보려 했지만 육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시계 장인들은 이 같은 초소형 부품들을 자유자재로 옮기며 ‘시계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 나갔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작업장의 창문도 눈에 띄었다. 1m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부품은 자연광을 통해 봐야 선명하다. 회사 관계자는 “작업을 하는 데 빛의 유무가 굉장히 중요하다. 작업시간도 오전 7시 즈음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만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조립 공간 맞은편에 제품을 수리하는 작업장이 보였다. 회사 관계자는 애프터서비스(AS)가 필요한 제품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이곳으로 모인다고 설명했다. 최고급 시계인 만큼 현지에서 수리가 어려운 제품은 시계가 생산된 매뉴팩처로 돌아와 시계를 제작한 장인들의 손길을 다시 한 번 거치게 된다. 1억 원이 넘는 초고가 시계답게 애프터서비스도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이날 1시간 남짓 둘러본 매뉴팩처에는 로저드뷔의 장인정신이 곳곳에 배어있었다. 회사 설립 20여 년 만에 로저드뷔가 최고급 시계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짐작이 됐다. 로저드뷔는 한국 고객을 포함해 매년 전 세계 VIP 고객들을 이곳으로 초청하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로저드뷔 매뉴팩처.도로시 헨리오 로저드뷔 마케팅 디렉터는 이날 “로저드뷔의 모든 제품은 이곳 매뉴팩처에서 생산된다”면서 “제품 생산 과정을 직접 본 고객들은 브랜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목표는 고객들이 로저드뷔에 미치도록(mad) 하는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과감하고 혁신적인 기술과 차별화된 경험을 통해 고객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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