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사진)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즐겨 읽던 소년은 9세에 ‘행복한 왕자’(오스카 와일드)를 스페인어로 번역할 정도로 총명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영어, 스페인어뿐 아니라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영국인 할머니의 영향으로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 문학에 매료돼 고대 영어, 노르딕어까지 섭렵한 언어 천재였다. 유전병으로 시력을 잃어가자 짧은 소설과 에세이, 시를 썼다.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동서양 고전을 엮어내며 고독과 실패마저 ‘작가의 도구’로 삼았다. 영혼의 눈을 뜬 그에게 ‘도서관은 천국’이었고 실명은 ‘위장된 축복’이었다.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1935년)를 비롯해 ‘픽션들’(1944년)에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발한 상상력이 담겼다. 시각장애인 사서가 주인공인 ‘바벨의 도서관’(1941년)은 현자의 독백 같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고 감탄했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수도사의 모델이 보르헤스라고 밝힐 정도로 그를 찬미했던 움베르토 에코는 ‘인류가 향후 천년을 먹고 살 양식을 남기고 간 2명의 대가’로 제임스 조이스와 보르헤스를 꼽았다.
‘장자의 나비 꿈’을 최고의 비유로 여긴 보르헤스는 지리적 상상력의 달인이었다. 독창적 시공간 개념과 미로처럼 얽힌 아이디어의 그물은 웹의 모태가 됐고 ‘매트릭스’ ‘아바타’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영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보르헤스에게 노벨 문학상을 줄 기회를 놓친 건 스웨덴 한림원의 수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지만 그의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페론 정권을 비판해 1946년 시립도서관 사서에서 해고된다. 20대 여성 소설가 칸토와의 사랑이 끝나자 상심해 여행을 떠난다. 고통 속에서 옛 애인을 닮은 여주인공을 그린 ’알레프’(1949년)로 국제적 인정을 받는다. 1955년 페론이 실각하며 국립도서관장으로 복귀하지만 이미 시력을 잃은 뒤였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대필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날개를 잃은 70대 작가에게 구원자가 나타난다. 아이슬란드 강연에서 만난 38세 연하의 마리아 코다마는 문학을 전공한 미모의 재원이었다. 비서이자 문학적 동반자였던 코다마 덕분에 그는 강연여행을 떠날 용기를 냈다. 일본 미국 터키 멕시코 알제리 이탈리아에서의 행복한 추억은 사진집 ‘아틀라스’(1986년)로 남았다.
간암 선고를 받은 보르헤스는 파라과이에서 코다마와 법적 결혼 절차를 마친다. 코다마는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르헤스재단을 이끌며 그의 문학적 유산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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