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때문에 ‘경단녀’가 된 10년 차 시사교양 방송작가. 간판 프로의 메인작가가 되기까지 열심히 달려왔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모든 게 달라졌다. 출퇴근이 필요한 기획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상실감에 난생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열풍의 중심에 선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소설가(40) 이야기다.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29일 조 작가를 만났다. ‘스타작가’가 됐지만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돌보느라 바쁜 평범한 엄마이기도 하다. 아이가 등교 후 오후 1시 반에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가 짬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강연, 출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도저히 소화할 수 없어 고사해 왔다. 그는 새 소설집 ‘그녀 이름은’(다산책방)을 출간한 덕에 모처럼 외출했다며 웃었다.
―올해 초부터 ‘미투 운동’이 뜨거웠다. ‘82년생…’의 판매 순위도 다시 뛰었다.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서 이를 어떻게 지켜봤나.
“많은 이들이 자기 경험을 용감하게 밝히며 문제 제기를 했다. 그런데 여론이 잠잠해진 지금, 명확히 처벌받은 결과가 나온 게 아직 없다. 용기를 낸 목소리가 의미가 있도록 상징적인 결과도 나오고 제도에 반영이 돼 실제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82년생 김지영’과 ‘현남 오빠에게’ 등 그는 여성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짚어낸,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첫 소설집 ‘그녀 이름은’ 역시 직장 내 성폭력을 고발하고 결혼과 이혼 때문에 갈등하거나 파업 현장에서 싸우는 등 나이, 직업이 다른 동시대 여성 28명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페미니즘에 천착하게 된 계기가 있나.
“현재 여성들의 삶이 기록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고, 어떤 한계에 부딪혔으며 어떻게 투쟁해 쟁취해 냈는지 말이다. ‘82년생…’이 한 인물의 일대기를 종(縱)으로 기록한 거라면, 이번에는 횡(橫)으로 보여주려는 시도를 했다.”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세대가 있나.
“아무래도 또래인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이다. 기회 자체가 없었던 이전과는 달리 남자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졸업했지만 사회에 진출하며 유리천장에 부딪힌 세대다. 나 역시 아이를 낳으며 경력이 단절되기 전까지는 출산과 육아가 일하는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제대로 몰랐다. 직업적 정체성을 잃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생각보다 큰 좌절감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그때 제정신으로 살았던가 싶다.”
―여성 문제가 남녀 대결로 번지고 있다. 여성혐오와 일상 속 차별은 여전한데 가장 먼저 달라져야 하는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독자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노회찬 의원이 ‘법과 제도가 의식을 견인하는 게 맞다’고 한 적이 있다. 제도가 현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지향점을 보여주며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동의한다. 제도와 법적인 장치가 구체적으로 마련되는 게 먼저다.”
그는 책을 읽은 후 동의하든 하지 않든 자기 의견을 말해주는 독자들이 참 고마웠다고 한다. 그는 “내 책이 독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기 경험을 나누고 그 목소리가 세상에 나오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후 뭐가 달라졌나.
“일단 차는 그대로다(웃음).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평수를 ‘아주 조금’ 넓혀서 이사 갔다. 평범한 맞벌이 가정이 된 셈이다. 소설은 유명해도 나를 알아보는 분들은 별로 없다. 이웃과 학부모들도 그냥 ‘글 쓰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무심히 넘긴다.”
―앞으로 작가 인생에서도 ‘82년생…’은 떨어지지 않는 수식어가 될 것 같다.
“인생의 한 시기를 넘긴 것 같다. 한번 불합리한 상황에 눈뜨고 나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이 작품이 내게 그렇다.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불법체류자 문제를 다룬 새 장편소설을 올해 하반기에 낸다. 여성에서 출발해 주변인들로 문제의식을 확장시킨 셈이다. 그는 “내가 쓰는 게 소설이 맞나, 문학적인 것이 맞나 하는 의문과 염려가 있었는데 독자들의 응원을 받으며 계속 써도 되겠다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성실히, 꾸준히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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