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인쇄 현장 덮친 악질 조선인 형사… 거금 주고 무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일 03시 00분


[토요기획]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제8화> 천운

3·1독립선언서 배포처였던 천도교 중앙총부(종로구 경운동). 3·1운동 당시 천도교 측은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성전 
건축을 명분으로 삼아 중앙대교당(오른쪽 사진)과 함께 이 건물을 지었다. 중앙총부 건물은 이후 수운회관을 지으면서 천도교 성지인 
봉황각(강북구 우이동)으로 옮겨졌다. 천도교 제공
3·1독립선언서 배포처였던 천도교 중앙총부(종로구 경운동). 3·1운동 당시 천도교 측은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성전 건축을 명분으로 삼아 중앙대교당(오른쪽 사진)과 함께 이 건물을 지었다. 중앙총부 건물은 이후 수운회관을 지으면서 천도교 성지인 봉황각(강북구 우이동)으로 옮겨졌다. 천도교 제공
1919년 3·1운동 거사 이틀 전인 2월 27일 밤, 보성학교 교내에 자리 잡은 인쇄소 보성사(현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 30평 남짓한 규모의 푸른색 벽돌 2층 건물 안은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졌다. 비밀 항일결사체인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 요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천도구국단장이자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1858∼1925)의 지휘 아래 부단장 김홍규(보성사 공장감독), 총무 장효근, 직공 신영구 등 단원들은 3·1독립선언서를 신속하게 찍어내고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보성사 비밀 창고에는 장총 10여 정과 수백 발의 실탄 등도 은닉돼 있었다. 보성사는 인쇄소이자 독립운동 조직의 아지트였다.(이종일의 ‘묵암비망록’ 참고)

대량의 선언서를 인쇄하는 만큼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다. 선언서가 한 장이라도 사전에 발각되면 독립운동 자체가 무위로 돌아가는 살얼음판이었다. 일경(日警)의 요시찰 대상인 이종일은 미리 자신의 씨족인 성주이씨 족보를 만드는 것처럼 위장막을 쳐놓았다. 실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주이씨들은 족보를 새로 만든다는 소식에 집안의 가계보(家系譜)를 들고서는 보성사 문턱을 분주히 넘나들었다. 이종일은 족보를 만드는 틈을 타 감시의 눈을 피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었다.(이종일의 손녀 이장옥의 생전 회고와 ‘묵암비망록’)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과 함께 한국의 출판 인쇄문화를 대표했다.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데도 두 인쇄소가 분담했다. 신문관에서는 활자로 인쇄판을 짜는 조판(組版) 작업을 담당했고, 보성사는 조판된 독립선언서를 종이로 찍어냈다.

민족대표 33인(천도교 15명, 기독교 감리파 9명과 장로파 7명, 불교 2명)의 이름이 명기된 독립선언서는 두 차례에 걸쳐 인쇄됐다. 1차는 2월 20일부터 서서히 인쇄에 들어가 25일에는 이미 2만5000장을 찍어놓은 상태였다. 이 인쇄물은 신축 중인 천도교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 내 이종일의 임시 거처로 옮겨진 후, 수천 장 단위로 천도교 지방교구에 우선적으로 배포됐다. 3월 1일 서울과 지방에서 동시에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한 사전 조치였다.(‘묵암비망록’) 실제로 3·1운동이 서울 탑동공원(지금의 탑골공원, 종로2가)에서부터 시작할 때 평양,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도 같은 날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 당시 이종일과 함께 생활했던 손녀 이장옥(당시 16세·1994년 작고)은 이렇게 회고했다.

“보성사로부터 은밀히 운반된 독립선언문 인쇄물이 집 안에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때부터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며 할아버지(이종일)로부터 몇백 장 혹은 몇천 장씩 선언문을 받아가지고 나갔다. 할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내가 책임지고 독립선언문을 내주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우리나라는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고 믿었다. 집에 드나드는 청년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묵암기념사업회, ‘손녀 이장옥 여사가 말하는 조부’)

그렇게 1차로 인쇄한 독립선언서가 동날 무렵인 27일, 이종일은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와 협의해 긴급히 1만 장을 추가로 찍어내는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약사’)

흥미롭게도 1차와 2차의 독립선언서는 조금 달랐다. 2차로 찍어내는 독립선언서는 1차 때의 오류를 고친 판쇄로 인쇄했다. 이장옥은 이를 뚜렷이 기억했다. 생전에 어머니 이장옥 여사의 증언을 들은 3남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이장옥)는 경운동으로 옮겨진 독립선언서를 보관하면서, 할아버지(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에서 오자가 발견돼 고쳤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하셨다. 처음 찍어낸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비밀리에 채자(採字) 작업을 서두르느라 국호인 ‘조선(朝鮮)’이 ‘선조(鮮朝)’로 거꾸로 조판된 채 인쇄됐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수정 전과 후의 독립선언서를 모두 간직하고 있었는데 6·25전쟁 통에 잃어버려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3·1독립선언서는 1차로 찍어냈을 때의 바로 그 원문이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표기돼 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鮮朝(선조)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이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 문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보다 더 잘 지었다”고 격찬할 정도로 명문이었다. 독립선언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육당(최남선)을 다시 보아야겠다”며 칭찬이 자자했다.(유광렬의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5일자)
묵암 이종일 선생의 손녀인 이장옥 여사. 오른쪽은 묵암의 제자인 역사학자 이병도(1978년 당시 묵암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냄). 묵암기념회사업회 제공
묵암 이종일 선생의 손녀인 이장옥 여사. 오른쪽은 묵암의 제자인 역사학자 이병도(1978년 당시 묵암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냄). 묵암기념회사업회 제공


○ 두 차례의 발각 위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이종일의 은밀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가 발각돼 3·1운동이 무산될 뻔도 했다. 28일로 날짜가 바뀌기 직전인 늦은 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돌아가는 인쇄기계 소리는 유난히 컸다. 보성사를 관할하는 종로경찰서의 한국인 형사 신철(다른 이름 신승희)이 근처를 지나다가 창문까지 굳게 닫힌 인쇄소의 기계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붙잡아 감옥에 보낸 악질 형사로 소문난 신철은 낌새를 눈치 챘다.

그는 곧장 인쇄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족보를 찍는 중이라는 이종일의 변명을 들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는 독립선언서가 쥐여졌다. 선언서를 읽어보는 신철의 손조차 떨렸다. 상황을 파악한 그에게 육척장구(六尺長軀)의 이종일이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것만은 안 되오. 이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손병희)한테 갑시다.”(이하 ‘천도교약사’ ‘묵암비망록’, 이종일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보훈처 발표(1995년 3월 1일) 참고)

이종일이 애원했다. 뜻밖에도 신철은 “당신이 갔다 오시오”하고 말했다. 이종일은 북촌 손병희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위급을 고했다. 사태를 파악한 손병희는 선뜻 5000원의 거금을 신문지에 싸서 내주었다. 평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돈을 받아 쥔 신철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겸연쩍게 웃더니 사라졌다. 그의 웃음에는 일말의 민족적 양심이 담겨 있는 듯도 했다.

그렇게 간신히 위기를 넘긴 이종일은 인쇄를 마친 후 이병헌, 신숙, 인종익 등을 시켜 독립선언서를 자신의 임시 숙소로 재빨리 옮기도록 했다. 보성사에서 직선거리로 400m 거리의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가려면 파출소 앞을 지나쳐야 했다. 이들은 손수레 깊숙한 곳에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그 위로는 성주이씨 족보로 덮었다.

으슥한 밤길에 손수레에 싣고 가는 물건은 일경(日警)의 눈에 띄었다. 불심검문을 당했다.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일경은 성주이씨 족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손수레에 실린 종이 뭉치를 죄다 검색하려고 했다. 족보를 다 들어내고 마지막으로 독립선언서가 나오려는 순간, 일대에 갑자기 정전이 발생했다. 가로등의 불빛마저 꺼져버렸다. 일경이 등잔을 가지러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파출소 상급자가 귀찮은 듯 “그만두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경운동 숙소로 들어오는 이종일은 온 몸이 땀으로 범벅돼 있었다. 긴장으로 흘린 식은땀이었다. 그를 맞이하는 손녀 이장옥에게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한편 고등계 형사 신철은 들통날 것을 우려해 동거녀까지 내팽개치고 만주로 도주했다가 1919년 5월 일제 헌병대에 체포됐다. 그는 경성으로 압송돼오다가 개성역 인근에서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한다.

3·1운동의 준비 과정은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숱한 발각 위험을 기적처럼 피해간 모험이었다. 3·1운동 모의부터 깊숙이 관여했던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 대해 “소름 돋을 만큼 계획이 소루(疏漏)하고 개방적이었다”고 회고했다.(현상윤, ‘3·1운동의 의의’, 동아일보 1948년 2월 29일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수일 전부터 인쇄한 선언서를 수백 장 수천 장 단위로 국내 각지로 발송하고, 서울에서는 남녀 각 학교 대표자 수천 명을 불러놓고 수십 장씩 선언서를 분배하고, 3월 1일 행할 시위운동의 노선 순서와 담당 부서를 정하고, 또 각 학교 대표들은 자기 학교에 돌아가 각반 대표들에게 동일한 지시를 하는 과정에서 의아할 정도로 아무 탈 없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민족대표인 김도태 역시 “완전한 모험이었다”고 하면서 “전국적이고도 거족적 대과업이 끝까지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완수되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애국정신에 불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 굶어서 사망한 독립운동가

일제는 3·1운동 후 ‘악질적인 항일 행위자’로 지목한 이종일에 대해 가혹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보성사를 즉각 폐쇄했다. 나중에는 일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방화로 인해 보성사가 완전히 소실돼 버렸다.

그러나 이종일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1921년 12월 3년의 형을 치르고 출옥하자마자 천도구국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제2의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이듬해인 1922년 2월 스스로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해 3·1운동 3주년이 되는 1922년 3월 1일 거사를 계획했다가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종일은 다시 외부와 격리된 채 일제의 극심한 통제를 받았다. 그는 밤낮으로 일경이 감시하는 상태에서 오막살이(당시 竹添町 1丁目 31·현 강북삼성병원 터)에서 일기를 쓰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1925년 8월 31일의 일이었다. 이튿날(9월 1일) 동아일보는 68세의 나이로 서거한 이종일에 대해 ‘기미운동(己未運動)의 선구(先驅) 이종일씨 장서(長逝)’라는 큰 제목으로 “영양 부족으로 작일(昨日) 정오에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종일의 친척인 이종린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한 가지도 없고 국가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일해 왔다”면서 “영양 부족으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는 조선 사람의 생각이 어떠할는지요? 장사 지낼 비용도 한푼 없습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금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숨진 그 자리는 흔한 기념 푯말마저 세워져 있지 않다.

3·1운동 후 이종일의 손녀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장옥은 독립선언서 배포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경에게 붙들려가 5개월간 호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장옥이 키가 작은 데다 실제 나이(16세)와는 달리 호적 기록으로는 13세의 미성년자여서 범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이장옥은 광복 후 독립운동 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이종일)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사양했다. 조손(祖孫) 2대에 걸친 독립운동 가족사다.


▼ 3·1운동 전개 상황 신속보도… 독립운동 전국 확산 기폭제 역할 ▼

이종일이 만든 최초의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이종일이 주도한 ‘조선독립신문’.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와 함께 뿌려진 지하신문이다. 동아일보DB
이종일이 주도한 ‘조선독립신문’.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와 함께 뿌려진 지하신문이다. 동아일보DB
1919년 3월 1일 경성의 독립운동 현장에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또 다른 유인물이 등장했다. 일반 신문의 호외판 크기로 ‘조선독립신문’이란 제호가 새겨진 신문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최초의 지하신문이자 민족 언론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이는 이종일이었다. ‘제국신문’을 경영한 언론인 출신인 그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는 한편으로 비밀리에 ‘조선독립신문’ 1만 부를 따로 발행했다. 자신은 33인의 민족대표로 체포돼 수감될 것이기 때문에 보성상업전문학교 교장 윤익선을 신문사 사장으로 내세웠다.(윤익선에 대한 1차 경찰신문조서)

‘조선건국(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자로 창간된 이 신문은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 민족에게 알리고, 3·1운동의 전개 상황을 신속 보도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려는 목적으로 배포됐다. 신문은 3월 1일 당일 탑동공원에서 약 4000부가 뿌려졌고, 천도교 청년들과 각 학교 학생들을 통해 일반 가정에도 배달됐다. 제2호(3월 2일자)에서는 “근일(近日) 중에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임시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도 전했다.

신문은 주로 구금된 민족대표자들의 소식, 전국에 걸쳐 일어난 독립운동 상황, 운동을 지지하는 해외 소식, 일경의 잔인한 행패 등을 게재했다. 신문은 일제의 그악스러운 탄압 속에서도 그해 4월 말 27호가 발간되는 저력까지 보여주었다. 5월 이후 8월 사이에도 발행인을 밝히지 않는 등 부정기적으로 10호가 추가 발행됐다.

민족 언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조선독립신문’의 출현을 계기로 국내외 곳곳에서 지하신문들이 등장했다. 그해, 중국 상하이에서는 이광수가 8월 21일 사장을 맡아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10월 28일에는 신채호가 주도한 ‘신대한’이 창간됐다. 이들 신문도 국내로 유입됐다.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 외에 일체의 신문 발행을 원천 봉쇄해왔던 일제는 지하신문을 억누르려 했으나 곧 한계에 부딪쳤다. 결국 일제 총독부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해 신문발행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된 배경이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1운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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