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명랑한 피아노 선율… 라벨이 전쟁에 희생된 벗들을 추모하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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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유럽 평원은 피와 신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의 격랑 속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사진)은 1915년 40세에 자원입대해 운전병으로 활약했습니다. 애초에는 군용기 조종사로 지원했지만, 심장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라벨은 전쟁을 무사히 넘겼지만, 전장에 나간 수많은 벗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17년, 라벨은 6개 악장으로 구성된 피아노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했습니다. 각 악장은 전쟁에 희생된 지인들에게 헌정했습니다. 자신도 조국을 위해 헌신했는데도 프랑스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기린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곡이 되었지만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에는 어둡기보다는 밝고 온화하며 때로는 명랑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17,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스타일의 건반음악 양식을 오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제목에 나오는 ‘쿠프랭’도 올해 탄생 350주년을 맞는 프랑스 작곡가 이름입니다. 지난해 이 코너에서 소개한 바 있죠.

‘무덤’이라는 단어에서 으스스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쿠프랭 시대에 ‘무덤(tombeau)’이란 말은 ‘기념물’ ‘기념음악’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목의 원래 뜻은 ‘쿠프랭을 기리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라벨은 이 밝은 피아노 모음곡으로 프랑스의 아름다운 음악문화를 찬미하면서,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라벨은 이후 전쟁에서 오른손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적’이었던 오스트리아인이지만, 라벨의 인류애는 내 편 네 편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기리는 현충일입니다. 각자가 이를 기념하는 방법은 다르겠으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자산을 돌아보거나 감상하는 것도 현충일을 의미 있게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윤종 전문기자 gustav@donga.com
#라벨#쿠프랭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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