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처음으로 말 배우는데, 꽃 꺾고선 그것을 즐거워하네. 웃음 띠며 부모에게 물어보는 말, 제 얼굴이 꽃하고 비슷한가요?”
조선 중기 예조·이조·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던 신정(申晸·1628∼1687). 밖에서는 바르고 엄격한 정사로 칭송받은 그였지만, 집에 돌아오면 영락없는 ‘딸바보’로 변했다. 정치뿐 아니라 시에도 능했던 신정은 딸을 위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실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잦은 밤샘 근무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다. 격무에 시달리던 그의 피로를 날려준 ‘자양강장제’는 다름 아닌 딸들의 재롱이었다.
“나흘에 한 번 겨우 집에 가는데, 어린 자식 오랜만에 나를 보더니 오려다간 다시금 머뭇거린다. 작은딸은 나이 이제 일곱 살이고 큰딸은 열 살이 조금 넘었네. 다퉈 와서 저녁밥을 권하더니만 무릎 앉아 다시금 옷깃 당기네.”(‘숙직을 마치고 나오다·出直’에서)
조선은 흔히 엄격한 유교 사상으로 강력한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인 사회였다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당대 아버지들이 딸에게 남긴 글을 보면 이 같은 통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최근 박동욱 한양대 교수가 낸 ‘너보다 예쁜 꽃은 없단다’(태학사)는 조선 사대부 72명이 딸에게 쓴 한시(漢詩)를 현대어로 풀어 소개했다.
박 교수는 “조선시대에 ‘딸을 낳으면 미역국도 먹지 않았다’는 말처럼, 정말로 그 시대엔 딸에 대한 사랑을 가벼이 여겼는지 의문을 풀고 싶었다”며 “실제 남긴 글을 보면 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은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남아 선호가 지배적 인식이었던 건 분명하다. 송몽인(宋夢寅·1582∼1612)은 딸을 얻은 뒤 “아들이라 기뻐하며 딸이라 슬퍼하랴. 끝까지 백도처럼 아들 없진 않으리라”는 시를 남겼다. 꼭 아들을 낳겠단 다짐엔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다.
하지만 잘난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고 했던가. 딸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한시도 있다. 조선 후기 대사간 등을 지낸 정기안(鄭基安·1695∼1767)의 시를 보자. “아들 낳아도 만일 재주 없다면 세상 뜰 때 제사가 뚝 끊어지고, 딸 낳으면 도리어 좋은 일이 되니”라며 뿌듯함을 드러냈다.
조선 문인들이 딸을 향해 드러낸 가장 큰 감정은 뭘까. 역시 시대가 그런지라, 안타까움과 그리움에 사무친 내용이 많았다. 딸이 결혼을 하면 친정을 방문하는 근친(覲親)이 아니고선 만날 기회 자체가 극도로 제한되던 시절. 문인 김우급(金友伋·1574∼1643)은 시 ‘딸아이가 친정 오는 것을 기다리며’에서 동구 밖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간절함이 생생하다.
“흰 저고리 입은 모습 눈앞에 어른거려, 문 나와 자주 볼 제 뉘엿뉘엿 해 기우네. 돌아와 슬픈 말을 많이는 하지 마렴. 늙은 아비 마음은 너무나 서글퍼지리니.”
박 교수는 “당대 사회는 여자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의 길인지라 아버지들의 애석함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는 걸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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